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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준비생 Apr 01. 2023

다시 마주한 노량진





1호선 노량진역 개찰구를 나가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신호등이 하나 보인다. 그 횡단보도를 건너서 들어가는 작은 골목길 안에 내가 다니던 독서실이 있었다. 나는 매일 그 땅을 밟고 신호를 기다리면서 생각했었다. ‘오늘도 또 하루 시작.’ 그렇게 오랜만에 방문한 노량진에서 순간 과거의 감정이 훅하고 깊게 들어와 소름이 끼칠 뻔했다.


노량진은 신기하게 이곳만의 냄새가 있는 것 같다. 수산시장 때문인지 약간의 비릿함도 느껴지면서 (정말 실제로 나는 건지는 모르겠다.)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그런 냄새가 있다. 땅값은 전혀 촌스럽지 않지만. 하하. 이곳 사람들의 기운이 모아져 그렇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나만 느끼는 냄새인가. 가슴에 잔뜩 힘을 주고 콧구멍으로 노량진을 빨아들여본다.


장수생. 불합격자. 노량진 최악의 아웃풋인 내가 노량진에 왔다.





후각으로 느끼고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노량진은 그전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그나마 역 근처 상권은 아직까진 활발한 것 같지만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텅텅 빈 채 ‘임대문의’만 덩그러니 붙어져 있는 가게들이 여럿 줄지어 보였다. 길가에는 그 이유를 알려주듯 듬성듬성 걸어 다니는 사람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노량진 거리의 모습이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도 한몫했겠지만 점점 떨어져 가는 공무원 경쟁률을 알려주던 뉴스가 피부로 와닿던 순간이었다.


어릴 땐 중요한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꼭 명동에 놀러 갔었다. 건물 전체가 매장이었던 명동의류에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옷들을 들춰가며 열심히 골랐었고 길가에 있는 신기한 음식들 하나씩 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든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타코야끼라는 음식도 명동에서 처음 먹어보았는데 그렇게 뜨거운 음식인지 모르고 한 알 그대로 털어 넣었다가 입천장이 다 데어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다.


크리스마스에도 역시 명동이었다. 여기저기 캐럴이 터져 나오고 화려한 조명들 덕에 밤에도 환했다. 가장 크리스마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던 곳이었다. 그때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랬던 명동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이제는 뭘 모르는 외국인들이나 가는 그런 곳으로 되어버리지 않았나.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다닐 때는 이렇지 않았어. 자리가 없었다니깐. 어머, 여기도 망했네.”

계속 혼자 호들갑을 떨며 옆 친구의 귀를 시끄럽게 했다. 노량진의 부흥기 한복판에서 함께 했었고 지금은 노량진의 쇠퇴기를 목격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도 벌써 역사처럼 느껴졌다. 내 제2의 고향. 인생에서 가장 치사하고 고단했던 시절을 보낸 곳. 애증의 공간인 노량진의 쓸쓸한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에잇! 고점에서 줄 섰었네. 재수도 드럽게 없지.”

나는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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