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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닭비둘 Oct 14. 2023

선배가 짤렸습니다

해고.

사용자가 근로자와의 근로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약하여 근로관계를 소멸시키는 일


선배가 잘렸다.

직장인은 숱하게 잘린다. 권고사직. 비위 징계. 경영상의 부득이한 이유 등. 사유는 다양하다. 이직이나 더 나은 직장을 가기 위해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는 것 처럼, 사용자와 노동자는 계약관계다. 따라서 해고는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르다. 방송국이라서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전 정부 시절 라디오국장과 전략기획실장을 잘랐다. 사유는 성실의무 위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불공정한 방송을 계속 두어서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이 왔단다.


멋지다.


사실 내가 잘린 것도 아닌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뭘 하겠느냐만 뭐라도 해야겠다. 


무의미한 탄원을 쓴다. 뭐라도 해야하니까. 안하면 분명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 아 나 역시 잘려서 후회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해야한다. 


한없이 비루하고 나약하지만, 그래도 방송국에 다니니까.



탄원서

사  건  서울특별시 미디어재단 TBS 인사위원회 (전 라디오제작본부장 징계(해고)에 대한 재심)


탄원이유

피탄원인인 라디오제작본부장은 해고를 당할 만큼 조직에 해악을 끼친 직원이 아니었음을 호소합니다.


피탄원인 체제의 라디오국은 역대 최고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전임 라디오제작본부장 시절에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피탄원인은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론칭하는 등 다채로운 편성전략을 성실히 펼친 본부장이었습니다. 그 결과 TBS-FM은 개국이래 최대 채널점유율과 최다 수상실적을 거두었습니다. 거대 민영방송과 전국구 공영방송에 버금가는 성과에는 눈감은 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공정성 시비만으로 피탄원인에 내려진 해고는 부하직원으로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피탄원인은 TBS 라디오PD들의 높은 신망을 지닌 선임급 프로듀서입니다. 중견급 후배들부터 막내급 사원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관심갖고 일러주던 고참이었습니다. 


2018년 6월, 전 라디오제작본부장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처음 입사한 PD에게 매일 TBS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작성케 했습니다. 처음엔 귀찮고 짜증났습니다. 한 달간 매일의 모니터를 마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귀로 들은 감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글과 소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변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타사는 물론 지금껏 그 어떤 선배 PD에게도 배우지 못한 훈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본 징계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피탄원인의 불성실로 인해 경영악화가 초래되었다는 명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또 예산이 삭감되고 조례가 폐지된 이후에도 피탄원인이 성실했다면 재단의 경영상황이 바뀔수 있었으리라는 가정이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괴롭고 힘든 지금의 TBS 상황이, 피탄원인의 잘못으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이 6년차 PD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피탄원인의 결정과 정책으로 인해 서울시와 시의회가 예산을 깎고 조례를 폐지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영방송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공영방송국이 국가 혹은 지방자치단체와 좋은 관계를 형성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정부와 방송사 간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사회책임주의적 합의 체계로서 운영되는 것이 공영방송이라 배웠습니다. 따라서 피탄원인의 정책결정이 TBS의 경영손해를 불러왔다는 명제는, 사회적 합의체계로서의 공영방송에 대한 이해가 거세된 채 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대표이사는 물론, 실본부장까지 모두 변경된 지금의 TBS 미래 역시 불투명합니다. 결국 이 상황에 대한 원인이 피탄원인의 불성실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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