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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ma Jun 25. 2023

[엄마, 안녕] 16. 중환자실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시면 우린 투석을 하겠다고 할 수가 없어요."


엄마는 고혈압을 앓고 계셨지만, 암 진단 이후 혈압이 계속 낮아졌었다.

일반 투석은 4시간 정도 걸리는데, 엄마의 혈압이 너무 낮아서 일반 투석은 진행할 수 없고, 중환자실에서 24시간 혈액투석을 진행해야 한다고 전공의가 말했다.


"바로 어제 중환자실에서의 투석은 마지막 단계라고 했잖아요?"

"중환자실 들어가면 나올 수 있나요?"


중환자실에서 24시간 혈액 투석은,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하며 마지막을 맞고 싶냐던 말을 생각나게 했고, 엄마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해서 난 두려웠었다. 불안으로 인해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인 사고가 어려웠었다.


전공의는 내가 답답한 듯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설명을 반복하다가 전공의는 주치의와 통화를 했고, 우선 일반 투석을 진행하다가 혈압이 문제가 되면 중환자실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투석을 위해 카테터를 삽입해야 하니 나보고 병실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엄마는 간호사나 인턴이 핏줄을 못 찾아 여러 번 주사를 찔러도 늘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었다. 그런데 엄마한테 카테터를 삽입한다고   얼마 안 돼서 엄마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병실 밖까지 들렸고, 그 외침은 삽입 시술 내내 계속 됐었다. 간호사는 병실과 의료용품 보관하는 곳에 계속 왔다 갔다 하며 뭔가를 가져가고 가져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대기하는 날 보고

"의사 선생님이 열심히 하시는데, 뭐가 잘 안 되나 봐요."

병실 안의 사정을 전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나나 엄마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시스템과 검사실의 일정과 의사의 일정 등등에 따라 달라졌다. 의사나 간호사가 언제 올지 몰랐고, 검사를 언제 하게 될지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거의 매 시간을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엄마에게 카테터를 삽입하던 그날은 병원에 입원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고, 평소에도 화장실 가는 것에 예민했던 난 3일간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배의 불편감이 심했고, 엄마의 상황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빨리 해결할 생각에 관장을 했다. 보호자한테는 약을 처방할 수 없다고 해서 간호사한테 허락을 받고 병원 밖 약국까지 뛰어가서 사 왔었다. 그리고 관장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공의가 와서 투석 이야기를 했었다.  이후, 난 병실 밖에서 대기하, 엄마는 병실에서 소리를 치던 그때,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아득해졌었다. 뱃속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화장실을 가라는 신호였었다.

연명치료의 마지막 단계라는 투석 때문에 엄마는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하필 고급스럽지 못하게 화장실 문제라니. 현명하지 못한 나의 행동에 다시 자책했다.

보호자로 있을 때, 자책하지 않기란 참 어려웠다. 생사의 문제에 가까이 가 있는 엄마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해야 하는데, 늘 상황은 다급하고 급작스러워서 현명한 대처를 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모든 순간 내 상황보다는 늘 엄마가 더 먼저야 했었다. 그런데 고작 화장실 문제가 날 고민에 빠지게 하고 엄마의 고통스러운 시간에 곁을 지킬 수 없다는 게 속상하기도 하고 시트콤 상황 같기도 했었다.


다시 병실을 나온 간호사한테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 같은지 물었다. 간호사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고 했고 난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바로 화장실로 갔다.


내가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한 시간 이상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카테터 삽입을 시작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나 병실을 나서는 전공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엄마와 전공의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던 듯했다.

전공의는 카테터 삽입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혈관촬영실에서 카테터를 삽입할 것이라고 했다.

밖에서 대기하는 동안, 엄마의 혈압이 너무 낮으니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하는 것이  엄마한테 더 좋으려나 고민하다가 전공의한테 엄마한테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물었다. 이미 지쳐버린 전공의는 일반투석하다가 혈압이 문제가 되면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할 것이라는 기존의 말만 반복하고 갔다.

병실에 들어가니, 엄마의 양쪽 허벅지에 거즈가 덮여 있고, 모래주머니를 눌러서 지혈을 시키고 있었다. 투석을 위해 왼쪽 팔은 혈압도 잴 수 없다더니, 팔이 아니라  허벅지 안쪽에 카테터를 삽입하려고 했던 모양이고, 결국은 허벅지 양쪽 모두에서 실패한 듯했다. 

엄마는 너무 아파서 투석을 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고 했다.

나중에 상처를 보니 꽤 굵은 구멍이 나 있었다.

1시간 30분 동안 살을 뚫는 고통을 엄마는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결국 혈관촬영실에 들어간 지 30분 만에 오른쪽 쇄골 밑카테터를 삽입하고 나왔다.

처음부터 혈관촬영실에서 하는 것은 안되었던 걸까.

평온하게 나온 엄마를 보자, 아쉬움은 더 커졌었다.


일반투석을 위해 투석실로 이동했지만, 역시나 엄마의 혈압이 낮아서 투석을 시도하지 못했고, 중환자실행이 결정되었다.

낮에 카테터 삽입을 시도했던 전공의가 와서 엄마에게 중환자실에 가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엄마는 낮에 느꼈던 고통 때문인지 전공의의 눈을 피하고 보지 않았다.

엄마는 혼자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거 같았다. 중환자실 앞에서 엄마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고, 간호사들한테 잘 부탁한다고 거듭 당부를 했었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가서 병실에 있을 수 없게 된 난 집으로 가야 했다.

불과 3일 만에 온 집이었지만, 집은 싸늘하기만 했다. 새벽에는 흠칫 놀라 깨서 이곳이 어딘지 한참을 둘러본 후에야 집인 것을 알았다. 집도 병원도 편안하지 않았었다.

24시간 중환자실에서 투석을 한다는 것은 24시간 후에는 중환자실을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것이 저녁 5시 정도였으니, 다음 날 5시면 나올 줄 알았다.

병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간호사한테 요청했다고 했다.


"어디야?"

"...... 어, 집이야."


엄마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병원 병실에서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난 괜히 엄마한테 미안해져서 변명처럼 말했다.


"엄마가 중환자실 가면 난 병실에 있을 수 없대. 그래서 이따가 오후에 병원에 가서 있으려고. 오빠랑 언니도 온대. 엄마"


그러나 엄마는 이미 마음이 상한 듯했다.

그리고 너무 아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무서운 곳에 자기 혼자 두고 다들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간호사한테 의사와의 상담을 요청했다. 2시간이 지나서 전공의가 전화를 했다. 혈액투석으로 소변도 나오고 크레아티닌 수치도 좋아졌다고 했다. 혈압 승압기를 떼야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데, 그건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 나오는지 묻자, 전공의는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확실하지 않은 말을 해줄 수 없는 입장이니까.

난 오늘 못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전공의는 심장초음파에서 심근경색 소견이 보인다고 빠른 시일 안에 심장부하검사를 하겠다고 동의를 하는지 물었다. 

결국 동의서 받으려고 전화를 했던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궁금하거나 우리가 필요할 때가 아닌 절차상 동의가 필요할 때에야 연락이 닿는 느낌이었었다.


엄마는 몸 이곳저곳이 다 안 좋은 거 같았다.


다시 병원으로 가서 중환자실로 전화를 하고 엄마를 연결해 달라고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자마자

"죽고 싶어."

라고 했다.

그 말에 난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내려앉았지만, 겨우 힘을 내어

"엄마가 잘 견뎌서 수치가 좋아졌대. 그런데 오늘은 중환자실에서 못 나오고 조금 더 있어야 한대. 엄마 언니도 왔어. 바꿔 줄게."

하고 언니를 바꿔줬지만 이미 엄마는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엄마는 거기서 죽어 나가는 사람을 봤었다고 했다. 남일처럼 생각되지 않았던 거 같고, 자신도 거기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무엇보다 투석 자체가 고통스러웠던 거 같았다.


엄마는 하루를 더 중환자실에서 보냈는데, 구토를 하고, 열이 나고, 승압기를 하고 있었는데도 혈압이 떨어졌었다고 했었다.  다행히도 처치 후 상태가 호전되어서 3일째 되던 날 중환자실을 나올 수 있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데,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우리 유니 못 보고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

난 엄마의 손을 잡으며

"잘 견뎠어. 고생했어."

엄마를 위로했었다.


중환실을 나서는 엄마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거 같았는데, 이제 더 이상 나를 지켜주던 엄마가 아니라, 떨어졌던 엄마를 다시 찾은 아이처럼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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