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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ma Jul 15. 2023

[엄마, 안녕] 18. 엄마, 안녕...

항암주사를 맞고 15일 만에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항암주사는 암세포뿐 아니라 엄마의 모든 세포들을 공격한 듯했습니다.


한 생명이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은 당사자와 곁에 있는 사람 모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을 다시 마주하는 과정은 힘들고, 그 과정을 세세하게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고민도 되고,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자꾸자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항암주사를 맞은 지 7일째 되던 날,

그리고 한방병원에 입원한 지 5일째 되던 날,

2022년 12월 20일,

엄마는 응급실을 가기 위해 구급차를 타고 있었다.


항암주사 후, 한방병원에서 진행한 피검사 결과 백혈구 수치가 1.42로 많이 낮고(참고치 4.0~10.8), 크레아티닌 수치는 3.6(참고치 0.49~0.91)이 나왔다. 그리고 12월 20일은 엄마의 혈압이 잡히지 않았다. 한방병원에서 사설 구급차를 불러줘서 혼잡한 퇴근길을 뚫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촉각을 다투는 환자는 아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급했고, 사이렌 소리에 길을 비켜주는 많은 차들이 고맙게 느껴졌었다. 덕분에 병원에 일찍 도착했다. 그러나, 당장 입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방병원 의사는 피검사 결과지를 보여주고 매달리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응급실에서는 왜 왔는지 물었고, 난 엄마의 혈압이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응급실 의료진들은 나 만큼 급해 보이지 않았고, 혈압을 측정한 후 대기하라고 했다.

우리를 태우고 온 사설구급차 직원은 엄마의 혈압이 차를 타고 오면서 조금 올랐다고 말했고, 이런 상황이면 응급실 앞에서 얼마나 대기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응급실 앞에서 2시간 대기하는 것은 기본이고 24시간 대기하기도 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뉴스에서 흘려듣던 이야기가 이제는 우리의 일이 되어있었다. 그제야 옆을 보니, 이미 대기 중인 환자와 보호자, 구급대원이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대기하는 환자는 더 늘어갔다. 나의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때 번뜩 한방병원 의사의 말이 생각났고, 다시 엄마를 불렀을 때, 피검사 결과지를 주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보다 결과지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한테.

의료진은 혈압을 다시 측정했고 다시 대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도착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응급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대기하는 다른 환자를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어렵게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는 검사하고 이상이 없으면 다시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네.' 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는 퇴원하지 않았다.


응급실은 이전에 왔을 때보다 더 소란스럽고 무서웠다. 어떤 환자는 내내 고통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엄마 바로 옆은 코로나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엄마가 감염에 취약한 상태라 너무 불안했지만, 들어오기도 힘들었던 응급실이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간호사들은 공격적으로 말을 했고, 질문에 길게 대답하면 말을 끊고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응급실에서는 더없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신장내과 교수님과 주치의가 각각 응급실로 왔다.

신장내과 교수님은 엄마가 뭘 먹지 못해서 신장수치가 안 좋은 거 같다고 수액치료를 더 해보고 PCN시술도 다시 하겠다고 했다.

5일 전 상급병원에서 전원 할 때, 엄마의 병력기록지에 수액치료를 요청했지만, 한방병원에서는 신장에 좋지 않다고 자주 해주지 않았었다. 대신 비타민주사와 면역주사를 더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시 응급실에서는 수액치료를 하자고 하니, 한방병원에서 우리는 뭘 했던가 또 후회를 했다.

잠시 후, 주치의가 와서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다고 걱정을 했다. 그리고 신장수치도 안 좋으니 다시 투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 신장내과 교수의 말을 전했다. 주치의는 투석은 신장내과 교수님 소관이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항암주사를 맞은 후, 백혈구 촉진제를 주사했었음에도 이렇게 낮아서 큰일이라고 추가 처방을 하겠다며 갔다.


응급실에서 29시간을 보냈다. 체감상 3일은 지난 듯 더 고되고 힘들었었다. 마침내 병실이 나서 새벽 1시에 옮기는데, 동의서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병실 옮길 때 비싼 병실 말고는 동의서 사인을 받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사인받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곳도 암환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 대답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는 말기 암 환자들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병동이었다. 엄마의 옆 침대에는 이전에 표적치료를 했다가 내성이 생겨서 이제는 어떤 약물도 듣지 않는 암환자가 모르핀진통제로 통증 조절만 하고 있었다. 그분을 보자, 엄마를 왜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병동의 간호사들은 환자의 통증에, 죽음에 아주 익숙한 듯했다. 


그중, 병동의 남자 간호사가 엄마를 친절하게 간호해 줘서 고맙게 느껴졌었다. 삭막한 응급실에서 왔더니 더 그렇게 느껴진 거 같았다.

날이 밝은 후, 친절한 간호사가 같은 병동 내의 1인실로 옮기겠냐고 해서 옮기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 더 비싼 1인실도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겠냐고 했다. 같은 병동 내의 1인실은 창이 있긴 하지만, 창 밖이 바로 벽이라서 답답하다는 조언도 해주었다.  

난 1인실이면 될 거 같았고, 그 친절한 간호사가 엄마를 더 돌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냥 답답한 1인실로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1인실은 그 간호사의 담당이 아니었다. 너무 아쉬웠었다.



1인실로 가자마자 새로운 간호사가 와서

'어머니 자녀분들이 더 계세요?'

'네, 3남매예요.'

'가까이 살고 계신가요?'

'왜요?'

'임종이 다가오면 갑자기 연락해서 와야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오기 힘드니까.'

'왜 갑자기 그런 무서운 말을 해요?'

'지금 그렇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 말은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말로 들렸다.




1인실로 옮기고부터 엄마의 상태는 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열과 오한이 반복되었고, 입안에 구내염도 생겨 말하기도 힘들어졌었다.

간호사한테 왜 열이 나는지 묻자, 간호사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보면서

'백혈구 수치가 낮으니까요.'

했다.


맞다, 난 무지하고 답답한 보호자였다.

그제야 난 백혈구 수치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통증을, 고통을 간호사들한테 전하고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 밖에 없었다.


엄마는 구토 때문에도 더 힘들어졌다. 구토를 하고 싶은데,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가슴을 쥐어 뜯기도 했었다. 엄마의 통증을 간호사한테 전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사무적이고 매몰차게 말했었다.

'엄마가 너무 아프시대요. 가슴이 터질 거 같대요.'

'이미 항구토제 주사하고 있어요.'

몰랐었다. 항구토제 주사가 투여되고 있는지.

그래도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처방된 주사제를 들고 와서

'어머니~'

하면서 만들어진 친절의 목소리로 말할 때 난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23일 금요일 오전,

엄마의 통증은 더 심해지는데, 주치의가 오지 않아서 답답해다가 병원 앱에

'선생님을 뵙고 싶다'라고 썼다.

잠시 후, 주치의가 왔다.

엄마가 몸을 떨고, 구토가 더 심해지고 있고, 피 묻은 가래가 나오고 가슴 통증이 심하다고 말했다.

이전에 내가 구토에 대해서 말할 때는 잘 듣지 않던 주치의는 엄마의 백혈구 수치가 좋아지면 내시경을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증상마다 검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신이 잘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앱에 글을 쓴 것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난 주치의가 다녀가자 앱에 썼던 글을 지웠다.

그러나 백혈구 수치는 0.26(참고치 4.0~10.8)까지 떨어졌고 이후로도 좋아지지 않아서 내시경은 못했다.

그리고 주치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이후 엄마의 구토는 더 이상 진액이 아니라 녹색물로 바뀌었고, 약을 먹지 않아도, 물을 마시지 않아도, 시간차를 두지도 않고 눕기만 하면 '가르릉' 소리가 나면서 구토물이 나왔다.

밤새 구토와 열로 힘들어하던 엄마는 새벽녘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왔는지 계속 묻고, 나에게는 밥 먹고 오라며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리고는 휴지를 포개서 가슴속에 넣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런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는 주사줄을 갖고 리본을 만들기도 했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무섭기도 했었다.


엄마의 구토물을 몇 번이나 호소한 후에 콧줄을 끼워서 액을 배출했다. 콧줄을 끼자마자 분수처럼 녹색구토물이 뿜어져 나왔었다. 그 양에 의료진들이 놀랐다. 그 액을 몸에 담고 있어서 너무 힘들고 아팠을 것이다.  콧줄이 가슴 통증을 줄여줄지 의사한테 물었는데, 의사는 그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콧줄을 끼고 나니 엄마의 타는 가슴은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간호사는 콧줄은 장폐색이 됐거나 장이 꼬였을 때 하는 처치라고 했고, 환자가 불편해해서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엄마도 콧줄이 불편한지 조금씩 조금씩 콧줄을 빼서 3번이나 다시 껴야 했었다.



병원에서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것은 명분을 쌓기 위해 절차상 필요한 것이지, 내 의견이 중요한 것은 아닌 거 같았다. 우리는 제시된 그것밖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일반 해열제로는 듣지 않아서 보험 적용이 안 되는 해열제를 쓰기 위해, 백혈구 수치가 더 오르지 않아서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백혈구 촉진제를 맞기 위해, 알부민이 모자라서, 피가 모자라서, 혈소판이 모자라서......

난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혈소판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2시간 후, 엄마는 아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으로 숨을 쉬는 거 같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숨을 쉬는 것처럼도 느껴졌었다. 이후 간호사들이 많은 기계들을 달고 처지를 했다.


그리고 그 밤, 엄마와 난 사투를 벌였었다.


엄마는 자꾸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 엄마한테 대변인지 물었더니, 대변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소변줄을 달고 있어서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고, 주렁주렁 달린 주사줄 때문에도 화장실을 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로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가려고만 했다. 힘없는 엄마여도 3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너무 지쳐버려서 엄마한테 짜증을 내며 갈 수 없다고만 했다.  

간호사가 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엄마의 소변줄이 새는 거 같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나와 함께 엄마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기저귀와 환의를 갈아입힌 후, 다시 소변줄이 새면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약해져 있어서 뼈가 부러지면 더 큰일이라고 했다. 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짜증을 낸 것이 미안해서 엄마를 봤는데, 엄마가 나를 보지 않았다. 엄마를 한참 달래는데도 엄마가 나를 보지 않아 나도 삐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부스럭 소리에 엄마를 봤더니, 엄마는 다시 기저귀와 바지를 벗어던지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다시 기저귀가 젖어 있었다.

그제야 엄마를 이해했다.

엄마 기저귀를 갈고 환의를 가지러 나갔다가 왔는데,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난 또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고, 엄마를 일으켜 세웠다. 내 비명소리에 간호사가 왔고, 간호사는 한 번 더 그러면 소변줄을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깜빡 잠든 사이에 엄마는 다시 바지와 기저귀를 벗어던지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응급실에서 했던 소변줄이 엄마한테 작아서 새는 것 같다며 소변줄을 교체했다. 그리고 엄마의 눈동자와 행동을 살피더니, 섬망일 수 있다고 했다. 이 병실이 시간 변화가 덜 느껴져서 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소변줄을 교체하고 환의를 다 갈아입은 엄마는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분을 찍어 바르는 듯한 행동을 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프기도 하고 참 엄마답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그렇게 단정하고 깔끔했던 사람이니까.

이후로도 엄마의 이상 행동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콧줄을 뺐다.


엄마의 섬망증상이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답답한 1인실에 있게 해서 그런가 자책을 했다. 고작 얼마 아끼자고 비싼 병실을 가지 않았던 내 짠돌이 습성 탓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아픈 엄마를 평소의 엄마로 생각하고 간호를 한 내가 또 너무 무지해서 미안했었다.


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엄마는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엄마는 구역감이 있다며 먼저 콧줄을 요청하고, 허리도 아프다고 진통제도 요청했다.

콧줄을 다시 삽입했다.

그리고 피가 부족해서 헤모글로빈 수혈을 했다.

그리고 3 시간 후, 엄마는 눈을 뜨지 못했다.

간호사와 신경과 의사들이 왔다. 요독수치가 높거나 뇌경색이거나 암모니아수치가 높아도 의식저하가 올 수 있다며 CT와 피검사를 진행했다. 조영제를 사용하지 못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CT상 뇌의 혈관은 변화가 없어 보인다고 했다.

간호사는 엄마의 수혈이 처음인지 물었다.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12시간 후, 엄마는 눈을 떴다.

의사는 이번에는 피 속에 나트륨이 많아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일 수 있다고 수액을 늘렸다.

의사가 그렇다니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눈을 떴지만 혀가 말려 들어가서 더 이상 말을 하지는 못했다.

엄마한테 

'눈 못 뜰 때도 내 말 다 들었어?'

엄마는 다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눈 떠서 너무 다행이야.'

엄마를 안으며 말했다.



엄마의 급격한 상태를 확인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동의서에 사인하는 일뿐이었고, 그럴수록 엄마의 상태는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는 치료를 받는데 왜 안 좋아지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더 이상은 없었고, 엄마의 상태를 정확하게 모르는 오빠나 언니도 엄마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오빠랑 바꿔도 되냐고 물었다.

엄마는 바꾸지 말라고  내 손을 잡고 눈으로 말했지만, 난 그런 엄마를 두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섰다.






내가 도망치듯 나왔던 그날 오빠가 간호할 때, 엄마는 수혈을 받다가 쇼크가 왔다. 그래서 수혈을 중단하고 엄마의 임종면회를 해야 한다고 우리를 불렀다. 언니와 형부, 새언니와 나는 서둘러 엄마의 병실로 갔다. 우리는 놀란 마음에 엄마를 보고 울었다. 난 도망쳐 나왔던 낮의 일이 생각나서 더 미안해졌었다. 그러나 엄마는 더 버텼고 오빠와 하루를 더 보냈다.


우리는 엄마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언니도 엄마와 시간을 보내게 해 주겠다고 28일 아침에는 언니가 엄마 병실에 들어갔다. 오빠와 나는 언니가 엄마의 병간호를 서툴게 할 것 같아서 아주 짧은 시간만 있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후에 내가 다시 엄마의 병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언니나 오빠가 나보다 훨씬 더 엄마를 잘 보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 4시 간호사는 임종면회를 하겠다고 가족들을 부르라고 했다. 언니는 병실 밖에 있었지만 오빠는 잠시 집에 다니러 가 있었다. 우리는 마음이 다급해지고,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아직 오빠가 오지 않았다고 울며 말했다. 다행히 오빠는 5시 넘어서 병실에 들어왔고, 아무 힘 없이 누워만 있던 엄마는 오빠가 왔다는 말에 상체를 일으키며 오빠 손을 잡았다. 이후로 엄마는 내내 오빠를 보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아들이 최고지. 그저.'

라고 농담 섞인 질투를 했다.

간호사는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언니는

'우리 엄마여서 고마웠어'

'나 이제 누구한테 전화해. 나 밥 먹었냐고 누가 걱정해 줘.'

했다.

오빠는

'엄마 이제 병원 말고 좋은데 가자.'

했다.

나는 엄마랑 같이 먹었던 밥 이야기를 했었다.

맛있었다고.


그리고도 엄마는 잠시 더 머물렀다. 그러다가 밤 11시 즈음, 내가 너무 배가 고프다고 매점에 가서 빵이라도 사 오겠다며 언니와 오빠한테 뭘 먹겠냐고 물었다. 언니는 종일 먹지 못했고, 오빠는 아침에 라면을, 난 김밥을 먹었었다. 언니와 오빠는 생각이 없다고 커피를 사 오라고 했고, 난 평소 엄마가 좋아하던 크림빵을 사 와서 병실에서 먹었다. 조금 먹다가 느끼해서 못 먹고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오빠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그렇게 갔다.


내가 빵 먹기를 기다렸다는 듯.

종일 굶고 있던 자식들이 걱정되었다는 듯.

뭐라도 먹어서 다행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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