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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1. 2024

리셋

관계가 무너지고서 드는 생각

삶이 무너져 내렸다는 말은 책이나 영화 속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짧은 간격을 두고 절친한 관계들이 무너졌다. 몇 년 전부터 내 본연의 모습을 찾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여러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꽤 충격적이었다. 오래 사귄 벗과 정말 끊기 어려운 사이가 어그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항상 그 애에게 내 삶의 방향성을 묻곤 했는데. 어느샌가부터 그게 진절머리 났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대로 고르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왜 그 애에게 내가 잘살고 있는지 확인받고 나서야 안심했을까.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서고 싶었다. 망가지고 넘어지더라도. 그런 마음이 넘쳐흐를 무렵, 그 애에게 잠시 안녕을 구했다. 나의 의존성을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끊기 어려웠던 그 애에겐 너무 바른말을 했다. 나에게 바른말은 남에게는 틀린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었을게다. 서로에게 꾸역꾸역 쌓인 서운함들이 이번 일로 터져버렸는지도. 그래도 내 말이 심했다. 나도 너무 입바른 말을 들었을 땐 존심이 다 구겨졌는데. 내가 항상 당해왔던 행동이었는데. 내가 그대로 대물림 했다. 그 애는 내 연락을 차단해 버렸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삶을 고되게 만들지만 사람 사이가 무너지는 것도 힘듦이 못지않았다.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들도 덧입혀졌다. 

내가 싫어서 끊어낸 관계에서는 허탈함을 느꼈고, 나를 끊어버린 그 애만 생각하면 내 존재에 대한 실망감이 들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내가 문제인 건가.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건가.'


이렇게 관계가 우수수 무너지면 내 장례식장엔 과연 누가 올까? 내 아이의 결혼식엔? 이런 상황에서도 관계의 양을 따지고 있는 나였다. 마음 한구석이 쨍하면서도 체면치레가 생각났다. 진짜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씁쓸한 웃음이 났다.      















마흔한 살이 되던 날. 연고가 없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거기인 동네라지만 이리저리 관계가 사슬처럼 얽혀있던 예전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주변엔 온통 산과 풀 천지에다 조금만 걸어가면 조그마한 바다마저 나온다. 과하게 외롭고 싶다면 그 속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완벽하게 만들어진 환경. 나는 철저하게 고립감을 느꼈다. 예전에는 외롭다면 무심하게 카페도 갈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한 환경 속에 살았는데. 이젠 괴로워도 할 게 없었다.



나는 이번 일들로 절망감이 들라치면 집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산을 바라보고 작은 들꽃들을 눈에 섬겼다. 보랏빛, 하얀 꽃, 분홍 패랭이 같은 색색의 꽃들이 나를 반겼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귀에 담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위안 삼을 게 없다고 느꼈던  이 동네에서 나를 걷는 행위를 섬겼다. 잡생각들이 내게 머무르지 않도록 주위를 살폈다.    


  

내 마음은 엉켜있지만 매일 아침 맞이하는 아침의 공기는 선물과 같았다. 아침 내음을 만끽하며 조금 서둘러 일어나 길을 걸었다. 내가 먹을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며 나를 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곳곳의 먼지들을 털어내고 어지러이 머무른 흔적이 남지 않도록 거실을 매만졌다. 출근을 준비하기도 바쁜 시간 귀찮고 버거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마음을 벼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시간이 명상과 같더라. 출근하기 싫은 내 마음을 다 잡아주기도 했다.


    

시간이 넉넉해지는 주말이 되면 친구를 잃은 상황들이 생각나며 또 쓸모없는 나라는 마음들이 덮쳐 온다. 그럴 땐 옷을 갈아입고 바로 산책길로 나섰다.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자연의 품속에 뛰쳐들기 위해.   

  

걸으면서 생각을 해봤다. 다시 태어났다고 마음먹으면 어떨까. 책에서는 돈이고 관계고 건강마저 다 잃어버리고서도 일어서는 사람도 있던데. 나도 그렇게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친구가 많았던 과거의 내가 마음에 드는가? 지금의 내가 더 좋은가. 


사람을 잃었어도 나는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 나 자신에게 솔직했기에 더 이상 우리의 관계를 부여잡을 수 없었던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사람이 다시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자. 조금씩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대에게 풀어놓기 시작해 보자. 너무 입바른 말을 하지 말자. 조금 더 부드럽게 상대를 생각하면서 말할 수도 있지 않니? 이번 일은 내게 그런 깨달음을 주었으니까 다음에 더 잘하면 돼.     


내게 경조사가 생기면 머릿수를 챙기기보다 위로받고 싶고, 축하받고 싶은 소중한 인연들을 부르자. 보기에 번듯한 사람들이 내 인연이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기를 더욱 바라지 않니? 껍질만 난무한 만남이 더 좋더니? ‘괜찮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하고 나지막이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더 좋지 않니. 쓸모없는 나라고 머리를 쥐어뜯는 내 앞에서 ‘니가 뭐 어때서’하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지 않니.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들에 잠긴다. 이렇게 또 삶을 하나 더 배우구나.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엿한 훈장이 남을 것이다. 모든 것을 교훈이라고 생각한다면 필요 없는 경험은 없는 것이다. 나는 아마 이전보다 관계에서 더 애쓰지 않을 것이며 더 내려놓을 것이다.(인간관계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깐) 내게 주어진 상황들을 더 받아들이고 곁에 머무르는 인연에 더 감사할 것이다.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할 것이고 마음이 어그러진 날들을 한번 더 견딜 것이다. 나 자신을 나무라지만은 않을 것이리라.     


그런 마음이면 됐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나를 위로한다.      


오전 일곱 시 십분. 걷다가 보니 벌써 밥 차릴 시간이 돌아왔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어지러운 생각들은 잠시 내려놓고 할 일에 집중한다. 

다시 돌아온 일상에 감사를 전하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매일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오늘을 맞이한다.      


‘뜻대로 되는 게 뭐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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