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받는사람:
날짜: 20XX.06.XX.
제목: 연금체납 관련 문의의 건
국민건강보험공단
담당자 귀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______이라고 합니다. 문의 드릴 게 있어 메일을 보냅니다.
얼마 전 국민연금체납사실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간 회사에서 제 몫의 연금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연금 미가입자였다는 사실도요.
사실 연금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급여명세서에서 매달 큰 금액이-저는 월급이 적어서 타격이 커요- 빠져나가는 건 알고 있습니다. 빠져나갔다는, 이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저는 몇 개월 전 이미 퇴사했으니까요.
회사에 미납 요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그간 밀린 금액을 제가 내고 가입 기간의 절반을 인정받는 방법이 있다고 안내받았습니다. 회사에 미납된 연금 납입을 요청했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궁금한 점은, 만약 회사에서 계속 연금을 내지 않는다면 공단에서 조처해주실 수 있는지입니다.
바쁘시겠지만 확인 후 회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보낸사람:
받는사람:
날짜: 20XX.07.XX.
제목: Re: 연금체납 관련 문의의 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 문의 드린 뒤로 한 달여가 지났네요. 회사는 여전히 답이 없어 다시 메일을 드립니다.
회사에서 내지 않는 경우 공단에서 강제할 방법이 따로 없다는 말씀 맞지요? 회사가 내도록 최대한 촉구해보거나 제가 내고 가입기간의 절반이라도 인정받으라는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잘 모르겠는 건요, 선생님. 왜 피해를 본 제가 나서야 하냐는 겁니다. 왜 불이익을 감수할지 말지가 제 손에 달린 것 같이 느껴질까요? 조금 억울하고 가혹하게 느껴진다면 감정 과잉인가요? 하지만 저는 회사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조차 힘들고 피로합니다. 연금 고갈 위기라 1990년대생부턴 어차피 연금을 못 받는다던데 여기에 에너지를 써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건 회사가 너무 괘씸하기 때문입니다. 다 제 사정이라는 건 압니다. 이런 얘기를 선생님께 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도요. 그러나 달리 말할 곳이 없네요. 그러니 좀 들어주세요.
첫 직장이었습니다. 뭘 하는 곳인지도 정확히 몰랐지만, 그저 그런 성적에 스펙 하나 없는 저를 뽑아준다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근로계약서를 써달라는 게 제가 회사에 했던 첫 요구였습니다. 대표는 ‘법적 권리를 따지기로 한다면 법과 무관하게 회사가 제공하는 혜택도 함께 사라지는데 괜찮냐’고 물어봤어요. ‘뭔 말인지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근로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대표는 저를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2년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다는 기쁨에 툭하면 자정이 넘도록 이어지는 야근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근수당도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에요.
솔직히 일을 좀 잘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공부 머리는 없어도 일머리는 있는 편인가 봐요. 어느 날은 협력 관계에 있는 높으신 분과 미팅을 하고 왔는데, 그분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제 능력을 칭찬한 일도 있습니다. 뭐 하던 사람이냐고, 어디서 저런 인재를 찾았냐고 물어봤대요. 대표는 제게 “너 가서 그 사람이랑 둘이 뭘 한 거야? 뭘 했길래 너를 이렇게 좋아해?”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만 없었으면 아주 뿌듯한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요. 당시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이상한 반응이라는 인상만 있었죠. 그러고 보면 대표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업무상 통화를 길게 하면 대표는 ‘상대방이 네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서 전화를 안 끊는 거’라고 말하는 식이었거든요. 외부회의에 늘 데리고 다니는 이유를 “내 행운의 부적이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제가 머리를 짧게 자를수록 “너 점점 머리가 짧아진다? 이러다 나처럼 자르는 거 아니지?”라 하고, 다른 여직원들에게 “쟤처럼 머리 자르면 안 된다.”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숏컷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주변에서 다 예쁘다고 칭찬한 머리였는데.
퇴사하고 나서야 그 모든 말 앞에 “20대 여자인”이 생략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이 모든 말을 여태 기억하는 게 이상할 만큼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제가 뭐든 좀 느리거든요. 변명하자면 하나하나 기억하고 해석할 여력도 없었어요. 거의 매일 새벽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고 종종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미 지난 일을 어쩌겠어요. 트라우마로 남은 것도 아니니 묻고 살아야지, 했습니다.
제가 아까 회사에 연락하는 게 힘들고 피로하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그 뒤로 자꾸 저런 일들이 꿈에 나옵니다. 얼마 전에는 대표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꿨는데요.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자도 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는 심리상담 같은 데 하는 게 맞을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 돈이 없는걸요. 무료 상담 같은 곳에 말하기도 싫고요.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 어떡해요? 잊고 잘 살았는데. 지금도 꿈만 안 꾸면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꾸 말로 꺼내다가 못 살겠다 싶어지면요?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고 살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에 씁니다. 왠지 선생님은 이 메일을 읽지 않을 것 같거든요.
감사합니다.
보낸사람:
받는사람:
날짜: 20XX.07.XX.
제목: Re: Re: 연금체납 관련 문의의 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회사는 돈을 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메일을 드린 뒤로 왠지 오기가 생겨 대표에게도 연락했는데 답이 없더라고요. 어쩌면 폐업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회사가 엄청 어려운 상황이긴 했거든요. 월급이 밀린 적도 제법 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업무상횡령죄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신고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해볼까요? 제가 회사를 협박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조금 시원합니다.
한 번 회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니 이제는 온종일 회사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제가 회사에 다니면서 늘 화가 난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통근에 편도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는데요, 지하철에서 저는 완전히 심술보였거든요. 늘 화난 목소리로 “내려요! 내릴게요!” 하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밀치며 지하철에서 나오곤 했죠. 저만 아는 음흉한 짓도 하나 있는데, 선생님에게는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백팩을 뒤로 맨 채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 있잖아요. 노트북이 든 무거운 백팩으로 사람을 밀고 치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도대체 누가 왜 앞으로 돌려 매지 않나, 관찰했습니다. 대부분 모바일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남자들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앞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백팩 위에 달린 작은 고리를 손잡이처럼 잡고 있었습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선 늘 사람 사이에 껴 있으니 잡을 데가 없잖아요. 편리하더라고요. 아무도 눈치 못 챈다는 생각에 통쾌하기도 하고요.
가장 화가 많던 시기는 아마 갈비뼈에 금이 간 채로 일했을 때일 거예요. 실금이라서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고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어 쉴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6시에 잠깐 회사 근처 병원에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실금도 금이라고,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아팠거든요. 그런 상태로 5일간 출장도 다녀왔는데, 4주면 붙을 거라던 갈비뼈가 6주쯤 지나서야 붙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가 성격파탄자인 줄 알았을 거예요. 누가 뭘 물어보기 무섭게 “아니요”, “안 돼요”, “안 된다고요”라는 말부터 했으니까요.
그 행사에서 운 기억도 있습니다. 회사는 경영진 남자들과 실무진 여자들로 이뤄진 곳이었는데, 그때쯤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가 최악이었어요. 그 행사에서 대표를 위시한 경영진들이 직원들에게 아주 저열하게 굴었고, 저는 분에 겨워 씩씩대다 울고 말았습니다. 다행인 점은 그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는 거예요. 대신 화를 냈죠. 자세한 말들은 잘 기억 안 납니다. '사람이면 그럴 수 있냐'며 악에 받쳐 소리 지른 것, 자릴 박차고 나간 것만 또렷이 남아있네요. 그게 스스로 좀 마음에 들었나봐요. 그 후 한 달쯤 버티다 퇴사했습니다. 이게 벌써 수개월 전이라니 신기해요. 전생 같기도 하고요. 전생이면 좋을 텐데.
첫 직장에 나쁜 기억만 있다는 사실을 연금체납통지를 통해 되짚는 게 썩 기분 좋진 않네요. 그래도 이 메일이 읽히지 않고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좀 낫습니다. 이상한가요? 그런 말 종종 들어요.
감사합니다.
보낸사람:
받는사람:
날짜: 20XX.08.XX.
제목: Re: Re: Re: 연금체납 관련 문의의 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고나 소송 같은 것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받지도 못할 돈을 위해 계속 매달리는 데 질렸거든요. 받지 못할 거로 생각하면서도 왜 세 달을 전전긍긍하며 살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생각을 전해드리는 걸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더는 메일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유는 처음 말씀드린 것이 전부인 듯합니다. 마지막까지 제게 불이익을 주는 회사가 괘씸하고, 왠지 내 권리나 혜택을 뺏기는 느낌, 손해 보는 느낌이 싫어서요. 어차피 못 받는 돈이라면 딱히 손해일 것도 없는데 제 심보가 그 모양인 거죠. 어떤 기사를 보니 이렇게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보가 복지를 위축시키고 연금에 관한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히 입체적인 논의길래 납작하게 만든다는 걸까요? 들어도 저는 이해 못 할 거예요. 제 삶도 저도 납작하니까요.
회사처럼 저도 안 낼 수 있다면 안 내고 싶은데 직장을 다니는 한 그건 불가능하겠죠?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이 더 적어진다니 억울합니다. 연금이 고갈되거나, 기후위기나 전쟁으로 인류가 망하거나, 둘 다 아니라도 저는 그때까지 살 생각이 없는걸요. 죽을 용기가 영영 안 생기면 그냥 살겠지만, 빨리 죽을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아요. 딱히 비관주의자인 건 아닙니다. 그냥, 사는 게 재미없거든요. 최근 다른 직장을 구했는데 야근도 별로 없고, 사람도 더 많고, 무엇보다 제 또래가 많아서 좋아요. 귀여운 애랑 연애도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왜 사는 게 재미없을까요.
어느 날은 퇴근하고 돌아와 가방만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어요. 배는 고픈데 밥 먹기 귀찮아서 언젠가 사두었던 맛밤 봉지를 뜯었습니다. 방은 캄캄했어요. 집에서 불을 잘 안 켜고 살거든요. 그렇다고 칠흑 같은 건 아니고요. 비상구 등이 현관 안쪽에 붙어 있어서 늘 은은한 초록빛이 돌아요. 제가 불법 개조한 원룸에 산다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장치입니다. 거꾸로 달린 완강기랑 세트로요. 저는 이게 좋아요. 제 정체성 같아요.
아무튼 맛밤을 두 개씩 입에 욱여넣었더니 목이 턱 막히더라고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삶이 너무 길다. 지루해 죽겠는데 앞으로 몇십 년을 잠잘 곳과 먹거리를 위해 일해야 한다니. 지친다. 물을 잔뜩 마시자 막혔던 목구멍은 금방 내려갔어요. 하지만 생각은 내려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 이렇게 쓰고 있는 걸 보면요.
선생님은 몇 살이세요?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일을 하신 지는 얼마나 됐어요? 선생님은 사는 게 재밌으세요? 재밌다면 비결 좀 알려주세요. 다들 저처럼 살 텐데. 어떻게 이렇게 사는지 다들 대단해 죽겠어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제 몫까지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