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위안과 사유할 책임
엄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 집안인 우리 가족 중에서도 가장 신실했다. 어린 나를 앉혀놓고 사람을 믿지 말라 가르치던 그는 모든 믿음을 신에게 줬던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형체도 응답도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게 도통 와닿지 않던 나는 십 대 후반쯤 탈종교 선언을 했다. 그 후 한동안은 신앙을 비웃는 데 열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종종 미사가 없는 시간을 골라 성당에 가곤 했다. 사람 없는 성당의 고요한 분위기가 좋았다. 고백하고 뉘우치면 뭐든 용서해 준다는 편리함에 기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질풍노도의 시기답게, 당시 나는 나의 거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부모 없는 사주야.” 친구 따라 처음 간 점집에서 들었던 말이다.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사주니까 싸워도 굳이 풀 필요 없고 따로 사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했다. 그 나이대, 노란 머리에 촌스러운 화장을 하고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는 애에게 쉽게 할 법한 말 중 하나였을 테다. 태어난 시간을 모른 채 봤으니 반쪽짜리 사주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런 사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안으로 이어지는 명분이었다.
“제가 잘 아는 선생님이 있는데 상담 한번 받아보실래요?” 점을 보고 일 년쯤 지나서였나,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가 건넨 말에 덥석 상담 약속을 잡았다. 선생님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여자도 선생님도 이상하단 느낌에 도망치듯 나왔다. 내가 너무 멍청해서 쪽팔린다는 자조에 친구는 벌컥 화를 냈다. ‘취약해진 마음을 이용하는 사이비가 악질’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내가 취약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내게 신앙, 점, 운세, 타로, 사주, 별자리 같은 것은 모두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쉽게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도무지 풀리지 않거나 풀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만 생각하게 해 주니까. 생각하는 대신 믿으면 되고, 인과를 찾는 대신 불가항력인 무언가를 바깥에서 끌어와 채우면 된다. 그러니까 이건 사유의 외주화를 통해 찾는 인스턴트 위안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운에 기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나 마음에 어두운 웅덩이가 하나씩 있다면, 그 웅덩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도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나름의 해결 방법을 찾는다. 웅덩이를 없애거나, 뚜껑을 닫아 묻거나, 끌어안고 사는 법을 터득하는 식으로. 나는 없애지도 묻지도 못해서 끌어안고 사는 방식을 택했다. 인스턴트 위안은 해결 과정에서 만난 시행착오였으나 그 순간들이 숨통이 되어주었기에 해결까지 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숨통을 틔울 시간과 기댈 공간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사유하지 않아서 얻는 위안이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괜찮지는 않다. 언제나 괜찮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정치일 테다. 이런 식의 위안과 정치가 연결될 때, 한 인간의 취약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영역과 정치인을 판단하는 영역의 차이를 실감한다. 가장 실감한 순간은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였다. 정확히는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의 관계가 보도되고 박근혜에게 연민을 느꼈을 때. 너무 어릴 때부터 사적 영역이 없었던, 그에게는 비극이었을 가족사마저 정치적 가십으로 소비된 여자. 정치 인생을 끝낸 사건까지 전 국민의 가십거리가 된 사람. 결핍에서 오는 취약함을 추스르고 스스로 안정을 찾을 틈이 없었을 것 같았다. 틈을 주려는 사람보다 결핍을 비집고 들어가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판이니까. 그 판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개인의 비극이 국가의 비극으로 이어진 상황에 참담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온전한 개인으로 살며 치유되기를 바랐다. 동시에,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신 인스턴트식 위안을 답습한 대통령의 무책임에 분노했다.
이 사건은 내가 유권자로서 정치적 사건을 해석하고 정치인을 판단할 때 사유할 책임을 묻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사고를 운이나 신앙 같은 걸로 대체해도 되나? 정치적 판단은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엄격한 윤리관과 감수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한 전략이어야 하지 않나? 여기에 형체도 근거도 없는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건 게으름과 무책임에 가깝다. 그리고 모태신앙으로 길러졌음에도 신을 믿는 데 실패한 내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정치인이나 점을 쳐서 정무를 보는 정치인은 같은 결에 있다. 정도와 대중성의 차이가 있을 뿐 믿음으로 사고와 인과를 대체한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든 개인의 자유이나, 믿음을 빌미로 정치적 사고를 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은 정계에 있을 자격이 없다.
정치적 사고는 결국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 공인이 아니더라도 시민은 누구나 사회적 책임이 있기에, 나의 삶 곳곳에도 사유할 책임에 따른 기준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사유하지 않아서 얻는 위안과 사유할 책임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만큼이나 모호하고 상대적일지 모른다. 그러니 유권자로서 정치인에 대해 내린 지금의 기준도 어디까지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누구나 어딘가에 기대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유할 책임이 있는 순간에 위안을 빌미로 도망치지 않아야 한다. 이것만이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