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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Feb 20. 2024

거품을 만드는 국가 (상, 프랑스)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1661-1700년) 불행한 황제였다. 그는 남미, 카리브해, 이탈리아, 멕시코, 필리핀 등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보 왕(El hechizado)이라 불렸다. 신체 불구와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국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일삼았다. 5대에 걸친 근친혼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람이 카를로스 2세였다. 그는 주걱턱에 혀가 커서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웠다. 키는 컸지만 다리가 가늘어 서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황제를 대신하여 또는 황제의 이름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카를로스는 생식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2번이나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었다. 그가 1700년 사망하자 제국의 승계 문제가 생겨났다. 카를로스는 후계자로 지명했다. 필립은 혈통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프랑스 필립이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면 국제적 역학관계가 변하게 된다. 유럽 대륙을 지배하는 프랑스와 전 세계 해상무역을 지배하는 스페인이 합체하면 초강대국이 만들어진다. 당연히 불편한 나라들이 있었다. 해상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영국에 새로운 제국과 황제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신성로마제국도 강력한 제국의 탄생이 걱정스러웠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찰스 대공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제안했다. 대놓고 내정간섭을 한 것이다. 왕위 승계를 두고 스페인과 협상이 깨지자 이들 국가는 1702년 선전포고를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3년 동안 이어졌다. 교전국들은 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다시 협상하였다. 필립은 협상 결과 프랑스 왕을 포기하고 스페인 왕이 되었다. 


                                                                           ***


전쟁비용은 엄청났다. 교전국들은 세금 대신 부채를 통해 전비를 조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영국의 국가채무는 전전 £5.4백만에서 £40백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이는 최소 국민 총생산의 44%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프랑스 국가채무는 20억 리브르(Livres)로 늘어났으며 이는 최소 국민 총생산의 83%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네덜란드의 국가부채도 2배 늘어 재정수입의 2/3를 부채를 갚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부채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 채권자들이 국가의 부채 지급 능력을 의심하면 앞으로 전쟁에서 자금 동원이 어려워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이들은 국가 부채를 줄여야 했다. 국가부채를 줄이면 앞으로 낮은 금리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 필요한 자금은 세금으로 조달해야 하지만 세금은 폭동과 혁명의 위험이 크다. 일시적인 국가부도도 생각할 수 있지만 위험한 발상이었다. 채권자들이 이러한 부도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앞으로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면 금리만 올라간다. 


                                                                          ***


가장 문제가 심각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세금을 늘리면 수많은 폭동이 일어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증세는 일단 제외했다. 프랑스 의회인 삼부회(Estates General)의 승인이 있으면 세금을 늘릴 수 있으나 왕은 삼부회의 소집 자체를 두려워했다. 의회의 승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세금은 빼고 부채 감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재정 긴축은 기본이었다. 통화에 금은 함량을 빼내는 눈속임 평가절하(Debase) 작업은 1701, 1704, 1715년 및 1718년에 했다. 금융 상인을 악덕 업자로 몰아 부당이득으로 1억 리브르 이상을 받아냈다. 여기에 더하여 국가 채무를 강압적으로 평가절하하여 약속한 금액보다 최대 1/3 낮은 금액을 지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는 1715년 재정적자 6천만 리브르를 48백만 리브르 흑자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국가부채에 대한 이자 지급액이 매년 9천만 리브르에 달했다. 원금 상환은 불가했고 이자 지급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로(John Law)였다. 그는 22살 때 결투에서 사람을 살해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로는 사형집행 대기중 감옥에서 탈출하여 대륙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전문 도박, 금융 서비스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무모한 천재였다.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Schumpeter)도 그를 인정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금융이론가라고 했을 정도이다. 



로는 1715년 파리에 입성하여 루이 15세의 섭정(Philip of Orleans)을 만나 문제 해결을 논의했다. 그는 영국은행을 모방하는 국가 은행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대안으로 로는 사설 은행 설립을 승인받았다. 은행의 성공은 권력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은행의 주식을 정부 실세에게 나누어 주었고 섭정은 초기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프랑스 정부는 입법으로 은행의 성공을 보증했다. 은행권은 현금으로 교환되었으며 세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1818년 프랑스는 이 은행을 국유화했다. 프랑스 정부는 은행 국유화로 돈을 마음대로 인쇄할 수 있게 되었고 투자자들은 연35%의 수익을 냈다. 사람들은 은행을 만든 로(John Law)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 영국은행은 사설은행으로 출발했다. 은행 설립 당시 영국 왕은 프랑스에 파괴된 해군의 재건을 위해 긴급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신용부족으로 8%의 금리에도 필요한 1.2백만 파운드를 조달할 수 없었다. 영국 왕은 은행을 허가하여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영국은행은 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기초로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가져갔다. 은행권은 일종의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주식 공모 12일 만에 1.2백만 파운드를 모금했다. 대영제국을 건설한 영국 함대는 이 돈으로 만들어졌다.**



로는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하는 허가도 받았다. 회사의 허가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왕의 특권이었다. 왕이 회사를 허가한 숨은 이유는 국가부채를 줄이는 데 있었다. 그는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공모하면서 정부 채권으로 만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 채권의 소유자는 최소 연 4.5%의 이자소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정부 채권을 포기하고 회사 주식을 구입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 자산의 대부분은 정부에 3%의 이자를 받는 채권이었기 때문이다.



로는 주식 가치가 폭등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줘야 했다. 미시시피 주식 기 열풍을 만들어야 했다. 그는 먼저 주식거래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2차 거래 장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시시피 회사가 소유한 일반은행(General Bank)을 통해 주식 구매 자금을 무제한 공급했다. 1719년 일반은행의 은행권 발행액은 2억에서 10억 리브르로 5배 늘어났다. 수요자는 주식 구매 자금의 10%를 납부하면 주식을 소유하고 추가 비용은 나중에 납부할 수 있도록 했다. 엄청난 신용 팽창이었다. 



미시시피 주가를 띄우려는 로의 전략은 이뿐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 발행하는 미시시피 주식을 사기 위해서는 과거 발행 주식을 소유하도록 했다. 이는 이미 발행된 미시시피 주식의 가격을 상승시켰다. 그는 미시시피 주식 가격이 정체하거나 하락하면 이를 매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부가 통제하는 언론에서 잘 충실하게 보도했다. 언론은 미시시피 주식 보유가 매력적이라는 그의 주장을 충실하게 기획 보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717년 140-160 리브르에 거래되던 미시시피 주식은 2년 후 10,000리브로로 폭등했다. 



로의 정점은 1720년 1월이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주가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는 오른 주식을 팔고 실물 화폐를 보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은화의 내용물을 줄였다. 법으로 500 리브르 이상의 화폐 소지를 금지하고 수출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들 법은 무시되었고 주식가격의 하락은 계속됐다. 로는 일반은행이 미시시피 주식을 9,000 리브르에 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 사기 위해서 일반은행의 은행권 발행은 늘어났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회사 주식은 1720년 5월 4,000리브로 이하로 떨어졌다. 일반은행은 문을 닫았고 미시시피 주식의 거래는 그해 12월 금지됐다. 로는 성난 투자자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로 도주했다.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와 금융 시스템을 만들었다. 사태는 1724년에서 안정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정부가 갚아야 하는 부채 이자는 87백만 리브르로 거품 이전과 변화가 없었다. 



프랑스의 급격한 재정개혁 시도는 실패했고 심각한 후유증이 찾아왔다. 우선 프랑스에 심각한 경제 불황이 찾아왔다. 1721년 파리의 물가는 디플레이션으로 38% 떨어졌다. 이는 대공황 당시 미국 물가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프랑스의 재정 개혁은 미시시피 사건으로 더 어려워졌다. 공공의 신뢰가 깨져 국가가 종이돈을 발행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과도한 정부 부채를 정리하지 못했다. 국가비상상황에서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이자는 한없이 높아졌다. 프랑스는 정부 재정을 하위 계층 서민에 대한 세금에 더 의존하게 됐다.  참지 못한 시민들은 프랑스혁명을 일으켰고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과 패전을 경험하게 된다. 




이 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수정 보완을 거쳐 다음 출판에 포함할 계획입니다. 



참고문헌

Boom and Bust (William Quinn & John D. Turn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1720 and the invention of the bubble page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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