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금만사 Apr 01. 2024

세금과 정치인의 노림수

정치인은 표를 얻기 위해 인생을 건다. 권력 획득에 도움이 되다면 평소 자기 생각은 무시하고 공약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기본인 세금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세금으로 표를 얻기 위한 파벌 싸움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세금을 두고 벌어진 미국 정치의 노림 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한가득 담겨있다. ‘정치는 원칙이라는 가면을 쓴 이익의 갈등이며, 사적 이익을 위한 공적 활동’이라 한 비어스(Ambrose Bierce)의 말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 건국 지도자들은 1780년대 토지, 사람, 재산에 부과하는 직접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직접세는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만 부과되어야 했다. 공화당은 이 원칙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세를 지지했다. 대표적으로 메디슨은 모든 조세시스템은 직접세를 부과하여야 한다 주장했다. 세금이 다른 가격에 숨어 있다면 시민들이 세금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밀리(John Smilie)는 국가의 세금은 시민이 피부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 했다. 자신의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관심을 가지고 시민 감시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직접세가 시민을 깨어나게 하며 부채를 늘린 정부를 견제한다 했다. 따라서 의회는 직접세를 부과하여 시민의 속을 쓰리게 해야 한다 했다.


이는 전략적 주장이었다. 정권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민이 현 정부를 혐오해야 한다. 당시에도 세금은 최고의 선거전략이었다. 트레이시(Uriah Tracy)는 정부는 세금을 징수하면서 이를 납부하는 국민에게 가급적 많은 고통을 주어야 한다 했다. 야당은 이를 투명성과 단순함이라는 정치적 수사(修辭)로 포장했다. 


야당의 전략적 주장을 여당이 위선이라고 분노하고 떨어 버리기는 어려웠다. 국가의 미덕으로 투명성과 단순함은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제퍼슨도 국가 재정은 농민의 가계부 같이 단순해야 한다 했다. 부담스러운 조세를 요구하는 속내는 농부의 순수함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당한 일리가 있다. 공화당(Jeffersonian)은 연방당(Federalist)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하고 싶어 했고 그 방편으로 최악의 조세제도를 도입하기를 원했다. 


집권 연방당은 공화당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연방당 입장에서 직접세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직접 손 내미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럼에도 의회는 독립전쟁의 부채를 갚기 위해 관세 이외에 추가적인 조세수입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재무장관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1791년 위스키에 물품세를 제안했고 의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

1790년대 관세는 미국 주요 항구에서 대체로 잘 징수되고 있었다. 재정수입의 대부분은 관세를 통해 조달했다. 관세 징수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상황이 달랐다. 인력이 부족한 세관은 작은 포구와 연안을 운송하는 소규모 선박을 단속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의 밀수는 눈감아 주거나 어쩔 수 없이 용인되었다. 


위스키에 대한 세금도 비슷했다. 대규모 양조장은 물품세를 잘 납부했으나 국경지대 작은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접경 지역의 소규모 양조장은 생산한 위스키를 현지에서 소비했고 세금을 납부한 일이 없었다. 국경지대에서 작은 양조장은 탈세를 모른 척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캔터키주에서 위스키에 부과하는 세금은 사문화된 규정이었다. 


그럼에도 워싱턴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세금을 강제 징수하려 했다. 작은 양조장에 세금을 부과하자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군은 세리를 협박하고 민병대를 조직하였으며 군사훈련을 했다. 연방정부는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1794년 워싱턴은 13,000명의 민병대를 직접 이끌고 반군 진압을 시도했다. 다행스럽게 반군은 사면 조건을 받아들였고 항복하여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이후 워싱턴은 반군 지도자를 즉시 사면했고 위스키에 대한 세금은 폐지됐다. 이후 의회는 1794년 다른 새로운 세금을 시도했다. 경매, 담배, 설탕, 주류 소매 그리고 마차 등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

공화당 갤러틴(Albert Gallatin)은 세금을 이용하여 북부 연방주의자를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전략은 복잡했지만 핵심은 간단했다. 세금의 정치성을 잘 알고 있는 갤러틴은 연방 토지세 신설을 주장했다. 그는 막대한 국가부채를 공격하면서 의회는 새로운 재정수입이 필요하다 했다. 그의 전략은 주 별로 세금을 할당하는 규칙이었다. 토지세가 부과되면 남부의 부자들은 자신의 토지에 비례하여 세금을 낼 수밖에 없다. 


부에 비례하는 이 세금의 형평성에 남부의 농민은 불만이 없다. 반대로 북부의 토지세는 알부자인 금융인과 상공인을 제외한다. 북부 농민이 자산에 비해 몇 배 많은 부담을 진다. 빈곤한 북부 농민들이 이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북부의 부자들이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세 총액을 주 별로 할당하면 북부의 농민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게 된다. 이 세금은 북부의 계층갈등을 심화시키는 묘안이었다. 결과는 투표로 나타날 것이며 공화당이 연방당에 승리하게 된다는 계산이었다.  


연방당은 바보가 아니었다. 갤러틴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토지세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했다. 남부의 주요 재산인 토지는 세금을 납부하나 북부의 주요 재산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세를 도입하면 북부에서 토지를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세금을 낸다. 그러나 북부의 큰 부자는 채권, 증권, 이자 수입이 많은 사람이다. 이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북부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세금이었다. 


연방당 울콧(Wolcott)은 대신 고가 주택에 직접세를 제안했다. 금융 및 상업 자산에 과세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개인이 가진 이들 재산을 찾아내고 평가하는 것은 자의적이며 사생활을 침해한다. 이는 민주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신 의회는 주택을 소득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 삼을 수 있으며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울콧은 에둘러서 그의 제안을 표현했지만 그의 방어 전략은 명확했다. 연방당은 가난한 사람이 소유한 주택은 면세하여 북부에 조세 형평성을 가져오려 했다. 


의회는 1797년 논의 끝에 직접세 대신 관세를 대폭 올렸다. 관세는 올렸지만 재정적자라는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프랑스혁명에 이은 전쟁과 해상 봉쇄의 여파로 관세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관세 수입은 1797년 $7.1백만에서 1799년 $6.6백만으로 줄었지만 미국은 유럽과 전쟁준비를 해야 했다. 


미국 상선은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새롭게 군함을 건조하고 육군을 보강하며 성벽을 쌓아야 했다. 1798-1800년 미국 함대는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해군과 교전을 치렀다. 미국은 해외 채권을 발행할 수도 없었다. 프랑스가 국제금융시장 네덜란드에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재정위기의 비상 상황이었다. 연방당은 직접세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전략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직접세라는 쓴 약을 삼키었다. 


연방당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자산에 세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했다. 과세 대상은 토지, 주택 및 노예였지만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금융자산은 제외했다. 주택은 고가 주택뿐 아니라 모든 주택을 대상으로 했다. 북부의 금융자산은 면제였지만 남부는 노예 자산을 평가하여 세금을 내는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보유한 노예의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는 당연히 어려웠다. 격론 끝에 의회는 노예는 1인당 50센트, 주택은 $100 이상 주택은 0.2센트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과세하고, 토지는 노예와 주택에 대한 세금이 정해지고 나서 가격을 평가하기로 합의했다. 


                                                                           ***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정치와 세금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불공정한 세금을 바로 잡겠다는 공약보다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공약이 더 유용했다. 이는 현재에도 유용하다. 다수의 유권자는 자기 이익을 스스로 희생하여 세금을 조금 깎아주겠다는 공약에 넘어간다. 결과는 초부자의 소득세와 상속세를 대규모로 면제하는 것이지만 유권자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영악한 제퍼슨은 비록 주택에 대한 세금이 누진적이지만 직접세로 연방당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연방당이 시민에게 직접세를 부과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세금의 세부 디자인은 의미가 없다 했다. 트레이스(Uriah Trace)도 같은 맥락에서 공화당의 직접세 부과 요구는 권력을 잡겠다는 악마의 희망이라 했다. 


1798년 연방당이 주도하는 의회가 직접세를 부과하자 제퍼슨은 승리를 선언했다. 그는 “상상이 만든 연방주의라는 질병은 이제 끝났다. 이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오고 있으며 그는 세금 징수원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했다. 


                                                                           ***

공화당은 직접세의 힘으로 1801년 정권을 획득했다. 집권하면서 공화당은 민심을 얻는 조치를 취했다. 내국세와 이를 징수하는 조직을 폐지한 것이다. 그리고 제퍼슨은 재정수입을 관세에 의존했다. 관세 수입은 유럽의 전쟁 상황에 따라 급변했다. 관세 수입은 1800년 $9.1백만에서 1805년 $12.9백만으로 늘어났다. 제퍼슨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관세 수입은 1808년 최고 $16.3백만을 찍고 다음 해 $7.2백만으로 떨어졌다. 


재정 수입은 해상 봉쇄의 전쟁 상황에 따라 크게 변동하였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미국 상선을 공격하지 말라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미국이 중립국을 자처하면서 양쪽 모두에 물자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 상선을 보호할 해군력도 없었다. 


제퍼슨은 최악의 상황에서 정부의 유일한 재정수입원을 스스로 차단했다. 미국의 대외무역을 금지했다. 그리고 제퍼슨은 1807년 미국 상선의 수출입을 금지시켰다. 경제와 재정에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해군을 동원하여 주요 항구를 봉쇄했고 육군은 캐나다 국경을 통한 밀수를 막았다. 미국은 이후 관계가 악화된 영국에 1812년 선전포고 했고 양국은 1815년까지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 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책에서 가져온 글이 아닌 새로운 글입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새글이 쌓이면 보완해서 새 책을 낼 계획입니다. 



참고자료

American Taxation American Slavery (Robin L. Einhor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Direct Taxes page 157-199

작가의 이전글 흑인 노예와 세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