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30인데 아직도 신입이다. 친구들은 한 가지 일을 진득이 잘하던데 난 왜 이리 여기저기 관심이 튀어 다녔는지.. 그래도 이제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의 힌트를 알아냈다. 중간중간 짧게 했던 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하면 경험한 일이 더 많지만 인상 깊은 것들만 추렸다. 인생은 connecting the dots,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나를 알아갈 수 있었던 일 경험이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특허 법률 회사 해외 관리직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가장 잘했다. 전공과 부전공도 모두 영어 관련. 막연히 영어 쪽으로 일을 하고 싶어서 영어를 쓸 수 있는 직무에 지원했다.
국제 특허 등록을 할 수 있도록 관련 서류를 준비하고 소통하는 일. 비즈니스 영어 이메일을 쓰고 인보이스와 특허 등록 서류를 다뤘다.
일단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전문직 지원 업무라서 난이도가 높았고 서류를 다루는 행정, 관리 일이 정말 너무 안 맞았다. 정해진 형식에 맞춰서 숫자나 영어 표현, 용어만 조금씩 바꾸고 반복하는 게 너무 지루했다. 근데 또 일은 많고 바빠서 어마어마한 양의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잡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 일은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 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평소 정적인 취미와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런 반복적인 일이 당연히 잘 맞을 거라 생각했다. 반대로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이 잘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인생에 처음으로 정신과진료를 고민했던 시기기도 했다. 관련해서 쓴 글.
영어 영상 번역
전 회사에서 사람한테 질려서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되고 싶었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영상번역을 시작했다. 영어회화 어플에 교육용 콘텐츠로 쓰이는 미드와 애니메이션 등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영어를 쓰고 내가 번역한 표현으로 누군가가 영어를 배운다는 게 뿌듯했다. 하지만 수입이 최저시급도 안 나오는 수준이었고 해당 프로젝트 담당자가 바뀌며 나에게 다른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 또 사람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 돈 받고 어차피 사람과 부딪히며 스트레스받을 바엔 다시 회사 들어갈래!' 결심했다.
영어 교육 뉴스레터 콘텐츠 기획
이전 경험 덕분에 영어 교육 스타트업의 콘텐츠 기획자로 입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재미있고 적성에 잘 맞았다. 주로 영어 학습 뉴스레터를 만들었다. 뉴스레터의 타이틀, 인트로 등 글을 쓰고 학습법, 표현, 영상 등을 큐레이션 하며 약 200개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타 플랫폼과 제휴하고 온라인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마케팅스러운 일을 했다. 많이 바빴지만 일이 가장 즐거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회사 내 조직개편으로 사업 종료를 하게 되며 1년 남짓만에 다른 직무를 맡게 됐다. 그리고 이 기점으로 10년 넘게 좋아했던 영어가 싫어졌다. (처음엔 덕업일치가 좋았지만 나중엔 정말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더 힘든 것 같다.)
영어 이러닝 PM
딱 요런 느낌. 스튜디오에 강사를 두고 촬영 감독을 했다. 조직개편으로 맡은 새롭게 맡은 직무는 영어 인터넷 강의를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은 하기 전부터 안 맞을 걸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영상 기획 과제를 하면서 '영상 콘텐츠 기획'이 잘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토리보드를 쓰고 화면의 비주얼적인 부분을 설계하는 게 싫었다. 게다가 이 일은 인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필요한 관리 업무(강사 섭외, 일정 관리, 커뮤니케이션 등)에 더 중점적이었다. 콘텐츠 기획과 제작 비중이 높은 일을 하고 싶었다.
일이 안 맞다는 걸 아는데 당시 회사 조건이 너무 좋아서 퇴사하기 힘들었다. 업계에선 알아주는 회사였고 대기업 뺨치는 복지에 무려 주 4일제였다. 현실 도피를 하며 이 일을 2년이나 하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콘텐츠 에디터
교육 업계에서의 3년 경력을 포기하고 또다시 신입으로 시작했다. 처음으로 영어와 관련되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하고 해외 경험부터 전공까지 모든 게 영어로 가득했던 나에겐 인생의 2막 같은 터닝포인트다.
회사에서 뉴스레터를 썼을 때 가장 재밌었고 성과도 좋았기 때문에 텍스트 콘텐츠 기획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글을 뛰어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라 선택에 많은 고민과 방황이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온라인 매거진에서 연예 분야를 쓰고 있다. 사실 연예, 가십보다는 (교육업계 출신 다운 성질인지) 정보성 글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지만 글 쓰는 것 자체는 너무 재밌다. 어서 내공을 쌓아 콘텐츠 에디터로서 주절주절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