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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Jan 23. 2024

4) 시어머니와 남의 편

빚과 가족의 상관관계

4) 시어머니와 남의 편


돈이 없는 부모. 사춘기부터 꿈의 걸림돌이 되고 20살이 되자 빚의 굴레를 만든 가족이 버거웠다. 도움은 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밑 빠진 독이 되는 가족.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만의 가족을 만들고 보금자리를 확보하면 다른 인생이 펼쳐지고 내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가졌다. 혼전 임신을 했지만 아이의 존재가 첫 단추라서 좋았다. 아이아빠와 나는 둘 다 이전까지 가족에게 돈을 보태느라 각자 모아놓은 돈이 전무했다. 아이를 함께 키울 장소가 필요했다. 무작정 들어간 그의 방은 감옥보다 감옥 같았다. 갈 곳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빚을 냈다. 월세집을 얻자니 매월 지출금액이 모두 사라진다는 게 아까웠다. 전세자금대출을 받았고 최소 필요자금 30%는 첫 계로 500만 원의 빚을 냈다.


만삭을 거쳐 아이를 낳은 후에도 부업을 했다. 부업으로 생활만 근근이 이어갔고 저축이 불가능했다. 아이가 태어났으니 저축 없는 일상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 아기생후 7개월 차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0개월 차에 취업했다. 모유수유를 끊고 대출금을 갚아나갔다. 아기돌잔치도 하고 두 번의 겨울을 다세대 북향집에서 보냈다. 전세만기가 다가왔고 방 두 칸짜리 빌라집을 얻었다. 화장실을 급조해서 만든 전세 1300만 원인 다세대쪽방에서 살다가 전세 2500만 원 집으로 이사를 한다니 기뻤다. 이삿짐을 풀고 짐정리에 정신이 없을 때 시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시어머니가 큰며느리에게 쫓겨났다. 큰며느리는 시어머니명의의 집을 팔고 자신의 명의로 전세계약을 했다. 시어머니의 명의 빌라집은 남편과 남편의 형이 총각 때 모은 돈으로 구입한 집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에게 시어머니를 모셔가라고 큰며느리나 형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시어머니를 다세대 지하쪽방에 가스연결조차 하지 않고 버렸다. 방안에 들어가니 냉골인 집에 어머니와 보퉁이만 덜렁 있었다. 이사하고 일주일도 되기 전에 방 두 칸짜리 좁은 빌라집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작은방에 아들방을 꾸며주고 싶었는데 시어머니의 방이 되었다.


가까이 함께 살면서 보는 시어머니는 가끔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말이 적고 온화어머니. 순하다고 생각한 모습에서 이상한 느낌이 드는 행동을 하는 것도 보게 되었다. 형편없을 정도의 음식솜씨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남편에게 집착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홀어머니라 그런 건가 생각했다. 설거지를 했다고 하는데 그릇에 오물이 묻어있는 것은 해결책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식사량이 많고 시시때때로 밥을 드시는 것도 괜찮았다. 밤에 문을 두드리고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면 놀랐지만 문을 잠그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하는 건 이상했다. 그리고 변비로 고생한다며 나에게 좌약을 넣어달라고 할 때는 기겁하고 말았다. 최소 2주에 한 번씩은 변기가 막히고 역류해서 집에서 똥냄새가 진동했다.


이상행동의 원인이 시어머니의 진단으로 납득이 되었다. 검사결과 정신지체 2급으로 나온 시어머니. 아픈 사람. 그저 받아들여야 할 뿐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문제였더라도 가정에 아주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지 2년이 지날 때쯤 남편의 일탈을 알아버렸다. 2년 넘게 급여를 속이고 개인적으로 돈을 융통한 걸 알게 됐다. 사용처에 따라 속상해도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확인한 사용처는 노래방유흥비. 혼자 자주 갔고 노우미와 놀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3일 동안 울기만 했다. 그동안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외면했던 남편의 일탈행위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이혼을 결심했고 준비했다. 이혼카운트다운이 막바지에 다 달았을 때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나보다 소득이 적은 남편. 2년 동안 급여를 속였기 때문에 더욱더 남편이 나에게 알려준 소득은 적었다. 겨우 본인의 용돈과 시어머니로 인해 늘어난 생활비만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쓰러지고 병원비가 두 달 동안 천만 원이 넘게 나왔다. 이혼을 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망설여졌다. '아이아빠를 궁지에 몰고 나는 아이에게 어떤 엄마가 되려 하는가? 아빠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면 어쩌지?' 아들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기 위해 이혼을 접었다. 그리고 이혼을 결심했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시어머니는 빠르게 쾌유했고 집으로 모셨다. 나는 낮에 둘 다 집에 없으므로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지만 남편이 극구 반대했다. 괜찮은 줄 알았던 시어머니가 퇴원 후 한 달도 되기 전에 두 번째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병원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마무시한 병원비가 나왔다. 계속 그대로 병원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중요한 치료를 마무리하고 규모가 다소 있는 요양병원에 모셨다. 한 달에 500만 원 정도의 병원비가 100만 원 정도로 적어졌다. 가정의 안정을 위해 둘째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두 차례 유산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쓰러진 후 2년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임대아파트 입주 후 어느 날 그가 또 집을 나갔다. 신혼 초부터 자주집을 나갔던 그는 싸우거나 기분이 나쁘다며 집을 나갔다.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는 나의 절규에 죽겠다고 소리치며 답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인이 되어 그에게 빌고 매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고 반성한다며 각서도 수없이 썼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그가 집 나가는 횟수가 확연하게 줄었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병원으로 가면서 그의 가출은 다시 시작됐다. 유산하고도 출근하는  모습이 스스로를 봤을 때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다른 가족들만 생각하느라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갔을 때 대문의 안전장치까지  걸었다. 나의 보금자리에 나를 끊임없이 상처 입히는 사람을 들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부모형제라는 가족을 떠나서 다시 만든 가족. 남편 아이 시어머니. 그들은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은 자주 나를 고립시켰고 더욱 불쌍하고 처절하게 만들었다. 내가 책임지고 챙겨야 할 가족을 다시 구성하기로 했다. 이혼은 가족관계를 편집한다. 이혼을 하면 아들만 가족으로 남게 된다. 그렇게 나는 가족 구성원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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