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늘 Jan 29. 2024

7) 빚의 고삐를 잡는 전략적 신용회복

빚과 가족의 상관관계

7) 빚의 고삐를 잡는 전략적 신용회복


"장기기증이랑 시체기증까지 했어." 작은언니가 신분증크기의 작은 카드를 보여줬다. "이게 뭐야?" 항목별로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난 자식들도 언제 볼지 모르고, 죽더라도 깨끗하게 가야지." 작은언니는 동생인 나와 같이 살고 있었지만 무심한 듯 말했다. 언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는 건 순서가 없다고 했다. 작은언니나 나나 누가 먼저 죽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 또한 어린 아들에게 험한 일을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기기증과 관련된 신청서를 작성했다. 우리 가족은 엄마, 오빠, 작은언니, 나 조카 둘 아들 일곱 명의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작은언니와 의 마지막을 맡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은언니와 나는 이혼한 여자로 사망할 경우 미성년자녀가 법정상속인이 된다. 자녀에게 부모 중 누군살아있다면 남은 한쪽이 미성년자녀의 대리인으로 상속권자가 된다. 이건 배우 최진실이 사망하면서 더욱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우린 재산이라고는 몸뚱이뿐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우리들의 자본금인 우리의 몸. 몸이 고장 나거나 폐기 처분되더라도 우리의 몫이 없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빠듯한 형편에도 보험을 가입했고 유지했다. 나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부양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작은언니는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지만 마지막에라도 엄마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사망보험을 가입했다. 보험금이 아이들 아빠에게 간다고 생각하면 아득해졌다. 우리 자매는 둘 다 아이아빠가 자녀를 잘 양육해 줄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 상속인을 지정했다. 나는 작은언니로, 언니는 나로. 둘 중 어떤 일이 발생된다면 조카를 돌봐주기로 했다.


일곱 식구의 일상은 바쁘고 빠르게 지나갔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듯이 소소한 사건사고도 많았다. 엄마는 월례행사로 화가 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카들이 많이 혼났다. 오빠는 계속 실직상태에 있었다. 일과 돈에 대한 의지가 없는 건지 담을 쌓은 건지 박제된 듯 가만히 숨죽이고 집안에만 있었다. 엄마가 화나는 일에 나는 이해할 마음을 내지 못했다. 어떤 일이 문제가 되었더라도 내가 보기엔 사소할 뿐이었다. 화내다 큰소리가 나면 다툼으로 이어졌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원인은 잊혀도 화가 난 상태는 계속됐다. 엄마가 화가 날 때면 나는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마지막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딸년 집에서 얹혀사는 게 잘못이지, 나가면 될 것 아니냐?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엄마가 한탄하며 하는 말을 들으면 미칠 것 같았다. 집을 나간다고 하고 죽겠다고 하는 말은 나에게 반사가 되어 돌아왔다. '패륜아가 되란 말인가?' 죽겠다는 하소연은 죽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예민해진 내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과도한 억측은 아니었다.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어릴 때 들었던 언어폭력이 그대로 마음속에 고름으로 남아있었다. 미취학 아동인 자녀들에게 엄마는 화가 나면 말에 거름망이 없었다. "니들은 왜 나가서 죽지도 않냐?"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은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엄마가 화가 날 때 하는 말이 푸념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를 공격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만큼 나는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세상 어디에도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작은언니가 조카들과 떨어져 지낸 지 몇 년이 지났다. 언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애써 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의 말말말이 또 한 번 터졌다. "자식들 떼어놓고 니가 할 소리는 아니지." 곪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심하게 울고 엄마와 싸우고 아파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언니~ 조카들 찾아서 보자.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어떻게?" 조카들의 아빠는 언니에게서 아이들의 행방을 감추고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니까, 찾을 방법이 있겠지." 주민등록초본이나 등본의 경우 가족관계의 사람은 누구든 열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민센터에 가서 알아보니 너무나도 쉽게 아이들의 주소가 나왔다. 주소지에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큰 조카가 초등학생이므로 학교라도 찾아가 보자고 했다.


D-DAY가 오고 무작정 주소지로 찾아갔다. 집으로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두 명의 아이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준아!" 아이들이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섰다. "준아~ 엄마야!". 언니와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조카들의 얼굴은 아이 때 얼굴 그대로였다. "오빠~, 오빠 엄마래!". 둘째가 오빠를 행해하는 말에 마음이 쓰렸다. "선이 엄마기도 해~" 둘째는 너무 어릴 때 엄마와 떨어져서 엄마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작은언니가 아이들을 얼싸안고 한참 어루만졌다. 이후 몇 주째 아이들을 보러 갔다. 작은언니는 몇 달 동안 아이들 준비물을 챙겨주었다. 그러다가 조카의 아빠가 아이들을 잠시라도 데리고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조카 둘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59m2 아파트에 일곱 식구가 아홉 식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라서 전학도 시켰다. 엄마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는데 진심이었다. 하루에 밥을 두세 번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즐거워 보였다. 치킨을 시켜도 다섯 마리를 시켜야 했다. 생활비가 늘었지만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커서 문제 되는 일이 없었다. 주말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줄 세워서 함께 대청소를 했다. 자동차가 경차 마티즈였는데 아이들을 모두 태우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대공원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고 너무 멀지 않은 곳은 여행도 다녔다. 중학생, 초등학교 고학년아이가 초등학생 저학년 아이를 앉고 가면서 낑낑거렸지만 누구 하나 싫다고 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아홉 식구가 되고 1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는 그즈음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영업직에 도전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러나 좀처럼 돈이 모이지 않았다. 지출목록을 보니 이자비용이 꽤 높아져 있었다. 이때 빚을 효과적 갚기 위해 신용구제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알아보게 되었다. 이직을 하려면 부족한 생활비를 보조하기 위해 목돈을 모아야 했다. 당시 전세자금 대출과 이자비용이 30만 원 정도 지출되고 있었다.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되면 8년 동안 원금을 나눠서 납부하면 된다. 이직을 할 경우 최소 1년 동안 생활비가 매달 100만 원 이상의 여분이 필요했다. 필요자금 2천만 원 중 1천만 원 정도의 여윳돈만 모은 상태였다. 이직을 하면서 1천만 원의 빚을 더 냈다.


20대에 생긴 빚은 내가 낸 빚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만들어낸 빚이거나 가족들의 필요에 의해 빚을 낸 것이었다. 가장이 된 이후 생활비는 가장인 나의 몫이었다. 내가 주체적으로 낸 내 빚이다. 10년을 빚에 쫓겨 다니기만 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빚의 고삐를 쥐기고 빚을 운용하기로 했다. 빚을 다루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빚을 더 내기로 한 것도 이직에 필요한 절차였다. 아홉 식구가 함께 살면서 내가 부담하는 생활비는 300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처음 보험영업을 할 경우 1년 동안은 소득이 200만 원이 근처라는 걸 알고 있었다. 1년 이후에는 필요경비까지 포함해서 350만 원 이상의 소득을 반드시 올려야 했다. 소득이 오르기 전까지 1년 정도 버틸 돈을 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이직 후 바로 신용회복위원회에 가서 워크아웃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매월 나가는 빚이 40만 원대로 고정됐다. 순수한 원금만 낼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