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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Apr 04. 2023

극작가가 됐는데 아무도 연극을 안보는 현실에 관한 건:

신춘문예 당선 1년 후

마침 신춘문예 공연시즌이 되어, 요사이 노동자로서만 가만히 있던 나를 데리고 나갔다. 연극은 넷플릭스에 상영하지 않아 대학로에 직접 가야 하니까.(그게 매력이라구요, 아시겠어요) 벚꽃이 흩날렸고, 모처럼 미세먼지가 미미했고, 날이 좋아서, 모든 것이 좋았다. 본인 작품 공연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 당선작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회상이 휘몰아친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지. 정확히 1년 전. 내 작품이 공연되던 마지막 날, 온갖 지인들이 대학로에 다 와서, 나를 보며 웃으면서, 그래 오늘만큼은 너가 짱이다 웃어주는, 날이 좋아서 모든 것이 좋았던 날. 날은 갑자기 을씨년스럽게 바뀐다.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스산한 바람을 막으려 외투 앞섶을 부여잡는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회상 끝. 암전.


※트리거 워닝: 이 글에는 이상과 현실, 꿈과 성취에 관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 관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거진 한 생애를 가만히 그냥 있던 내가 어찌저찌 작가가 되었다. 공연 두 번, 책 두 권, 인터뷰 수차례, 사진 무시무시하게 많이, 또다른 장막 대본도 5개쯤 썼으나 다 쓰레기 수준이라 서랍에 처박았다. 새로운 지인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포털에 검색하니 그 무시무시한 사진들이 떡하니 기어나왔다. 포털을 멀리하며 땅속에 머리 박는 타조가 되었다. 극내향형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들이 아니었으나, "나 infj니까 이만 꺼질게욧!"라고 울면서 뛰쳐나갈 형편이 아니었다. 아, 그것도 웃기긴 했겠다. 나는 분명 글을 사랑하고 언제나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 후의 일들까지 세세하게 상상해놓았던 적은 없었으므로, 지난 1년간 심히 당황하며, 그러면서도 즐겁고 행복하며, literally 울며불며, 뭘 잡았다 싶었다가도 놓치며, 됐다 싶다가도 멀었다 나는.


 그동안 연극을 너무 안 봤다는 반성으로 1년간 부지런히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느낀 것은, 연극은 늘 보러 오는 애호가들이나 관계자들 혹은 지인들이 대부분이고(물론 그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스타 캐스팅이 아니면 새로운 관객 유입은 좀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그마저도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ㅠㅠ) 주말 혜화역에는 사람이 미어터지게 내리는데 그들 중 몇 퍼센트가 공연장으로 향할까 생각할 때 현타가 왔다. 매진이거나 거의 매진인 걸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인터넷을 활발히 사용하지 않는 관객층의 존재를 감안해도, 포털이나 SNS의 리뷰가 한두 페이지만 넘어가도 끝이 날 때. 나는, 앞으로, 극작가로, 살. 수. 있. 을. 까.


 작가가 되었다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극작가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먹고 살 수도 없다. 심지어 지난 몇 달간은 작가도 아니었다. 순전한 노동자였다. 위에 나열한 퍽 당황스러웠던 이벤트는 당선작가가 1년 동안 반짝 받는 주목일 뿐이다. 그 후엔 몰라 나도. 난 그냥 있습니다.


 다시금 작가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신춘문예 작가들의 워크샵에 참석했고, 지난 몇 달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것도 안 쓰고 있던 무지랭이 나 자신을 반성하며 삼선짜장면 흡입했고, 신춘문예 페스티벌 공연을 보러 갔고, 공연장 근처 야외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함께 작가정체성을 들이켰다. 잘 흡수가 됐으려나. 맥주건 정체성이건 그런 건 하여튼 배출이 너무 빨리 된다.


 누군가 어떤 책이나 영화가 좋았다는 얘길 꺼내면 다들 바로 폰을 꺼내 메모하면서 세상의 훌륭한 것들을 흡수하려 노력하는 동료작가들의 모습이 취기 오른 중에도 흐뭇했다. 아, 저렇게나 글을 사랑하고 잘 쓰고 싶어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론 나도 바로 메모했다. 좋은 건 놓치지 않을 거예요.



 다시 현재. 벚꽃이 흩날린다. 나는 바닥에 갈라진 곳마다 고여 있는 벚꽃잎들을 보며, 취기 오른 중에 그러나 멀쩡한 중에 되뇌며 그런 시 하나를 떠올린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작가님. 이라고 남들이 갑자기 절 그렇게 부르더군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작년 한 해 동안 잘 먹었습니다. 올해도 어찌저찌 잘 지어다 먹겠습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하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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