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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주 May 03. 2023

소라게는 좋겠다 즈그집 있어서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이삿짐 싸네

갑각강 십각목의 집게과에 속하는 절지동물. 정식 명칭은 집게이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도구인 ‘집게’와의 혼동으로 인해 편의상 ‘소라게’로 부른다. 비어있는 소라 껍데기나 달팽이 껍데기 등 몸에 맞는 패각을 발견하면 뒤집어쓰는 습성이 있다. 어린 것은 부화하자마자 즉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에 맞는 패각을 찾는데, 커감에 따라 주기적으로 큰 패각을 찾아 옮겨간다.
출처: 다음백과


 가까깡 시깡목 지께까. 분류는 다소 어려우나 이름과 생긴 것은 참으로 귀엽구나. 그리고 너희는 어릴 때부터 자가패각이 있구나. 부럽다.


 느지막이 독립을 한 뒤로 나는 늘 세입자였다. 가족과 살 때는 이사를 한번도 주도해본 적이 없었고, 나라는 존재는 이를테면 쓸모는 그닥 없으나 꼭 가져가야 하는 이삿짐 중 하나였기로, 이사가 이렇게 개빡센 대장정인 줄은 몰랐다. 2년 전에 운 좋게 재계약이 성사되어 첫 독립한 이 집에서 4년을 내리 살았다. 행복했다. 그러나 운도 유통기한이 있는지 4년이 넘으니까 남은 운이 없어, 이 패각을 타소라게에게 영구히 넘기겠으니 세입게는 나가주시오, 라는 공문이 내려와 급하게 뒤집어쓸 다른 패각을 찾느라 두 달 동안 몸은 동분서주 마음은 혼비백산.


 1. 새 패각을 찾을 것.

 그새 짐이 많이 늘었다. 맨몸으로 태어나 무슨 놈의 짐을 그리 많이 늘렸는지 자괴감이 심하게 들었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거 지가 영원히 살 줄 알고 참나.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너 뭐 돼?"

 그러므로 새 집은 지금 집과 사이즈가 같아야 했다. 도저히 줄여갈 수가 없었다. 근데 그새 금리 인상 등으로 보증금이며 집세며 왜 이렇게 올랐는지 나는 이사를 가는 순간 쫄딱 망한다, 그 생각만 소름끼치게 계속 들었다. 그렇다고 이사를 안 갈 수도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집을 정했다. 그러고보니 이삿날 양장피를 먹었는데 겨자소스 너무 많이 부어서 진짜로 울면서 겨자 먹었다.


 2. 이삿짐센터를 찾을 것.

 솔직히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 그게 거대한 패착이었다. 이삿날이 하필 손 없는 날. 뒤늦게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와준다는 데는 없고, 견적 내주는 앱에서는 손 없는 날이라고 어마어마한 금액을 불렀다. 또 죄인이 되었다. 네깟 게, 거지되는 게, 감히, 손 없는 날, 이사를 가려고? 어림없지.

 네. 어림없어서 이삿날을 하루 당겼다. 돈도 돈이지만 도대체 4차산업혁명 시대에 아직도 그런 샤머니즘에 왜 순응해야 하는지 반항심이 들어서, 바득바득 손 있는 날 이사 가겠다고 다짐했다. 왜 나를 이리 만드나요, 손님?

 너무 분해서 '손 없는 날'을 소재로 몇 시간 만에 아주 짧은 단막극을 시놉도 없이 구상도 없이 마치 작곡가가 히트곡을 10분만에 작곡하듯 후루룩 써내려갔다. 그러고는 그 정도 분량을 받아주는 어느 희곡 공모에 그것을 시원하게 제출했다.


 3. 현 패각을 원상복구 할 것.  

 인테리어용으로 타일과 거울에 붙인 스티커를 떼다가 죽을 뻔했다. 물론 다 깨끗이 제거 가능하다. 아세톤으로 지우면 흔적도 없이 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내 팔과 어깨 근육을 다 갈아서 문질러야 되는데 하다가 욕 나와서 멈추고, 안 하면 안 되니까 다시 하다가 욕 나오고, 이건 뭐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 너무 나온다. 뭐 선크림이랄지 뜨거운 물이랄지 스티커를 제거하는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붙이지 말 것을 후회했다. 뗄 때 자신을 비난하고 저평가하고 멸시하게 된다. 시트지의 경우 집주인한테 허락받으면 안 떼어도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역시 원상복구를 해놔야 되는데, 시트지같이 어마어마하게 스티키한 걸 떼려다가 코어나 팔근육 같은 게 잠시 외출하셔서 최소 드러눕거나 최대 입원하는 수가 있다. 아무리 예뻐도 스티커는 안 된다. 다 자신을 위해서다.


 4. 각종 돈 문제를 해결할 것.

 그것은 사연이 너무 많아 찢어버린 편지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뭐 좋은 얘기라고. 다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분의 돈이 없어 은행에 굽실거리면서 끝없이 어떤 문서로, 어떤 공간으로 소환되면서 내가 얼마나 이 사회의 죄인인지 재인식하며 내 위치가 얼마나 하찮았는지 재차 깨달았다는 것만 밝혀둔다. 하아...


 5. 짐, 짐, 짐. 그것은 하나의 단어이자 현상이며 족쇄이다.

 일단 버릴 물건을 다 버렸다. 그러는 데만 한 세월이 걸렸다. 인간이 너무 소모와 소비의 징그러운 주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아동문학을 읽을 때 인상 깊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들지. 아이는 아이 것을, 어른은 어른 것을.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
"정답은 쓰레기야."

-은이결, <최후의 탐험대>, 2018, 키다리, pp.145~146.

 이 미친 아이가 지가 뭐라고 자신의 존재를 꼭 알려야겠다고 쓰레기를 이리 만들어? 그렇게 자신을 힐난하며, 하고 많은 버릴 것들을 버리며, 왜 너 자신은 버리지 않느냐 너도 쓸모없는데 자학하며, 그럼에도 이 거대한 비극을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이며 유쾌하게 헤쳐 나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며.

 그러고 나서 남은 잔짐들을 다 박싱했다. 당일에 짐 싸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그러면서 내가 마치 내 집이라는 도서관의 오랜 사서라도 된 것처럼 모든 짐의 물품목록과 위치정보와 분류항목을 통달한 듯 잠시 뿌듯도 했다. 거대한 착각이었지만. 사서는 무슨. 사서 고생해서 사서다.


 이사 전날은 잠이 안 왔다.

 아. 나 이사 가면 쫄딱 망하는 거 아냐.

 오로지 그 생각 때문에.


 갑자기 급하게 거지되고 싶으면 이사 가면 된다.

 이삿날 모든 잔금과 각종 대금을 치르고 나니 통장의 하찮은 숫자들은 낟가리의 빈껍데기처럼, 키질을 하면 금방이라도 승천하여 잡을 수도 없이 시야에서 멀어질 것처럼, 있었는데 없었어요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현황
육지 소라게는 애완용으로도 널리 판매되고 있다. 주로 판매되는 종은 인도소라게, 딸기소라게, 피피소라게, 캐비소라게, 푸르푸르소라게, 바이오라센츠소라게 등이다.
(출처: 다음백과)

육지 세입게는 애완용으로도 식용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판매되지 못한다. 최근 새 패각으로 옮긴 뒤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착각했던 모든 짐들이 뒤섞여 제 몸을 코팅할 그깟 바디로션 하나 찾지 못하여 온 방 온 박스를 뒤지고 다니면서 더욱 존재가치가 떨어졌으며, 이렇게 된 이상 정리를 포기하겠다, 다음 이사 때까지 그냥 이리 살겠다, 라며 계획형 세입게는 놀랍게도 모든 걸 놔버렸다. 음... 인도카레 좋아하구요, 딸기 좋아하고, 피피, 캐비, 푸르푸르는 나중에 혹시 강아지 고양이 키우면 이름으로 고려해보겠구요, 바이오라센츠? 되게 생명공학적일 거 같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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