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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 May 28. 2023

버퍼링 트라우마 극복기

낭독, 두려움에서 즐거움으로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 돌아가면서 모둠 발표할 때다. 갑자기 다른 모둠 발표자는 나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책의 한 페이지를 읽어달라고 했다. 내가 어버버하며 제대로 읽어나가지 못했을 때 나를 바라봤던 그 친구의 어이없는 표정이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다. 이후 주변이 음소거되며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푹 숙인 것 밖에는.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는 유독 낭독을 많이 시켰다. “오늘이 3월 17일이니까, 17번! 53페이지 읽어봐!” 내 번호 끝자리와 날짜가 같은 날이면 난 어김 없이 긴장했다. 혹시나 나를 시킬까 조마조마하다가, 재수 없게 걸리면 반 친구들에게 망신살이 뻗치는 날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유명한 명언인 “좋은 책은 혼자가 아닌 수천 명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를 많은 사람 앞에서 낭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좋, 좋은 책은 혼자 아, 혼자가 아닌, 수천 대, 수천 명...과... 대화는... 대화하는... 거...것과 같다.” 난 낭독에 약했다. 책을 읽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글자의 배열이 마구 섞이는 느낌이었다. 눈으로 읽기보다 입에서 목소리가 먼저 튀어 나가버려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글을 읽는 것도, (내가 쓴 글을 읽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에) 글을 쓰는 것도 멀리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나의 낭독 공포는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학교 4학년 졸업 파티에서는 관행적으로 과대표가 사회를 보고, 부과대표가 송사를 낭독해야 했다. 부과대표였던 난 많은 학우와 교수님들 앞에서 글을 읽는다는 것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글을 잘 읽는 친구에게 송사를 부탁했다. 그렇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바로 남들 앞에서 글을 읽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탄생과 동시에 동화책 낭독은 피할 수 없는 엄마의 숙명이었다. 나의 버벅거림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엄마와 책 읽는 시간을 기다렸다. ‘만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힘을 받아 아이에게 매일 밤 책을 읽어주었다. 틀리면 틀리는 대로, 건너뛰면 건너가는 채로 읽어줬다. 한글을 막 뗀 아이들이 죽 소리 내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난 호흡이 긴 동화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한 번에 내용 파악이 잘 안되었다. 그래도 계속 읽었다. 일곱 살이 된 첫째 아이, 준이가 읽기 독립이 되었을 때는 내가 잘못 읽어주는 부분을 고쳐주기도 했지만 부끄럽거나 창피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수백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며 우리는 성장했다. 아이는 책 읽기의 즐거움을, 나는 낭독의 즐거움을 만났다.


  낭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눈과 입의 속도 조절이다. 입이 절대 눈보다 빠르면 안 된다. 눈이 먼저 읽은 다음 적당한 속도로 따라가며 입이 말해줘야 한다. 혹시 급한 마음에 입이 조금이라도 앞서 가게 되면, 바로 버퍼링이 시작된다. 듣기 좋은 낭독 속도를 만드는 건 정말 쉽지 않다. 무엇보다 눈으로 읽는 묵독이 속도를 내야 하는데, 나의 큰 문제는 묵독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눈은 느리지 입은 말하고 싶어 하지, 들썩거리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면 버벅거림은 피할 수 없다. 묵독과 음독을 번갈아 연습하며 나만의 낭독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이들과 함께하니 자연스레 나의 낭독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이제는 짧은 구연동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에는 독서 모임에서 한 권의 책을 돌아가면서 소리 내어 읽는 윤독 모임을 내가 권하기도 했다. 동화를 뛰어넘어 성인 책에도 도전하게 된 것이다. 글쓰기 모임에서는 내 글을 읽는다. 그렇게 낭독하며 나만의 버퍼링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잘 읽을 수 있으니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지금도 마음이 급하거나, 갑자기 훅 들어오는 낭독에는 철렁하고 마음이 내려앉지만, 버벅거림을 곁에 두고 꾸준히 읽어나갈 것이다. 언젠가 많은 사람 앞에서 내 글을 당당히 읽는 그날을 위하여.      


독서 모임에서 윤독한 책 (남들 앞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책을 읽은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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