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현 Dec 11. 2023

무기력



  요즘 어느 노래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어 신곡을 듣지 않게 된 게 어느덧 두 달이 넘었다. 거의 7년을 넘게 해 오던 습관을 버리게 됐다. 매주 새로 나온 노래를 재생목록에 담고 출퇴근하면서 취향에 맞는 노래만 골라 저장하던 걸 이렇게 오랜 기간 안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상 포기했다.

 그렇게 하면서 얻은 가수들이 있다. 박원의 [노력], 적재의 [별 보러 가자], 샘김의 [SEATTLE], Colde와 Crush, DEAN, 폴킴.. 이 가수의 존재를 모르고 지나치치 않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DPR LIVE까지. DPR LIVE의 [Jasmine]을 알게 된 이후로 이렇게 좋은 노래를 내가 모르고 지나칠까 봐 한때는 병적으로 신곡 리스트를 만들어 듣고 또 들으면서 노래를 추리곤 했었다. 하루에 100곡을 추린 적도 있었다.


 Youtube premium을 가입하게 되고 출퇴근 시간이 짧아지면서 하루종일 자리에 앉아 온갖 어려운 지식을 머리에 욱여넣기 바쁜 올해가 된 이후로 신곡을 고르는 '듣기에 신중한 일'은 집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감정에 맞지 않는 노래가 귀에 들리는 게 거슬리던 때가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래를 고르는 건 마치 죄악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고,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고르자니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신곡을 재생목록에 올리는 빈도가 한주에서 한 달로 미뤄지고, 그렇게 해도 내가 놓치는 신곡들이 이미 목록에서 사라져 갔다. 점점 스트리밍을 외면하고 플리(PlayList의 준말)라는 걸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습관도 편집증의 일부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주 미약하게 내 어릴 적엔 편집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과물도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된 듯하다. 글을 쓰는 것이든 노래를 솎아 듣는 것이든. 허나 이 나이에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해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견뎌보려고 하니 그런 건 이제 미련도 안 남는지 제일 먼저 버리게 됐다. 물론 그다음은 내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 안 하기였다.

 그 와중에도 내 귀는 내 감정과 고도를 항상 같이 하기에 비슷한 분위기를 표현해주는 노래를 가끔씩은 열심히 찾는다. 간간히 잘 들어맞아서 그럴 때엔 이렇게 글을 쓴다. 지난 [포옹]이라는 글도 마찬가지. 그 글은 세븐틴의 노래 [포옹]을 우연히 들었다가 마음이 동해서 써내렸다.


 오늘 이 글은 샘김의 [무기력]이라는 노래를 듣고 쓰게 되었다. 이 무슨 뒷북인가 싶었다. 샘김을 내가 눈여겨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런 수록곡을 내가 놓치다니. 지난 몇 년 동안 한 내 습관이 무색해졌다. 포기에 당위성을 두는 걸지도 모르지만. 쨌든 내가 이 노랠 모르고 올해를 보냈다니 나 자신이 가여워졌다.


 무기력이라는 말은 내 인생에 없었다. 부지런한 삶을 산 건 아닌데 그냥 나랑은 맞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나란 사람은 씩씩한 사람이었으니까. 남들이 그렇게 말했다. 단순하게 난 튼튼했고 힘으론 지지 않았다. 특히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건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들이 붙여주는 단어는 건강, 튼튼, 욕심, 씩씩함이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무기력을 검색해 보면 읽기만 해도 무기력해지는 말들 뿐이다. 혹은 건강이 안 좋아져도 무기력해진다니, 정말 나랑은 먼 얘기 같다. 잘 아프지도 않은데 아파도 하필 남들이 모를 때 아프거나 심하게 아프지도 않아서 나약하다는 말도 못 들어봤다. 어쩌면 비교당하면서 크다 보니 더더욱 나는 육체를 일컫는 형용사에 나를 맞춰 넣고 이해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9살, 10살에 난 어쩌면 무기력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심각했었다. 그 어린 나이에 가난을 탓하는 게 무서워서 학교를 안 갔다. 사주팔자에 다사다난하다던 내 타고난 살 때문인지 10대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만의 세상에 잠겨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무기력에 의한 도피처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기질이었을 수도 있다. 무기력보다는 도피 성향, 회피 성향이라고 나는 먼저 진단했다. 나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고 보니 난 왜 그렇게 도피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그러면서 현실은 또 남들이 보기에 대단하게도 열심히 산다. 그래서 판단했다. 나란 사람은 욕심은 많은데 그저 이루어졌으면 하고만 바라는 게으른 사람이구나 하고.


 그 절정이 지금이다(어쩌면 매번 지금의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풀어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하필 [무기력]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참 와닿는 거다. 확실한 건 예전 같지 않는 나의 모습에 왜 이렇게 무기력한 지 나를 탓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나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오늘도 몇 번 울리는 알람을 끄고 눈을 감고 또 감았다.

 그저 돈 벌어서 나를 책임지고 싶었던  스물셋의 나는 알바하기 위해 일어나는 시간이 6시 반이었는데도 일 끝내고 나와서 보는 세상이 밝은 게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 반대의 '무기력'한 나일 때에는 언제나 어두운 세상에서 화면만 보며 내 감정을 몇 번이고 우려내고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른 채로 새벽하늘을 보면서 잠을 잤다.


 지금도 난 이런 내 우울과 무기력이 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솔직히 난 내가 이런 기분일 때의 모습이 좋다. 차분하고 조용해진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오래 잠겨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럴 때엔 내가 나쁘게 된 적도 없다. 오히려 이런 시간에 이 무기력함에 잠겨 나를 곱씹고 나를 달래주는 소리만 들으면서 하고 싶은 대로 있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게 사랑스럽게 보이는 지경에 이르니까.


 다만 지금 나의 이 무기력이 나한테 오래 앉아있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감정들은 다 좋다. 그치만 이 어색한 무기력함은 나를 점점 벼랑으로 이끄는 것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해버릴까 봐 걱정이다. 난 이걸 해내야 하는데 자꾸 무기력해지면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 수 없잖아.


 [무기력]의 영어 제목이 [The Weight]이다. 실제 무기력의 영어 이름은 Lethargy이다. 무기력증이라고 뜨는데 한자로 보면 기력이 없는 증상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샘김은(혹은 작사를 해준 정승환은) 어떤 의도로 무게를 의도하는 weight을 썼는지 왠지 나는 이해가 간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무기력하면 그렇게 중력이 나를 잡아당길 수가 없으면서 또 어떤 행동을 해도 몸이 그렇게 나른할 수가 없다. 가끔은 내가 약을 먹었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날아가있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나를 짓누르고 있기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어차피 해결되지 않는 거기에 난 짓눌린 채 견뎌야만 내일이 온다.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도 참 잘 만들었다. 어쩜 내 취향인지 낮달과 하늘, 그리고 구름이 마치 무기력해진 내가 의미를 찾기 위해 아무 의미 없이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글로 결과를 냈다. 언젠가는 눈물로 해소해야지. 그럼 더 개운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비긴 어게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