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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현 Feb 18. 2024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임시보호를 이후로 언젠가는 우리, 꼭 개를 키우자 하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나는 이전에 있었던 개와의 인연이 업보로 남아 있었고, 남편은 개를 좋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는 것에 적극적인 건 나였지만 막상 무슨 생명이든 집안에 들여놓으면 남편이 훨씬 지극정성이다. 표현하지 않아도 손이 가는 관리의 면에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보다 남편이 크다.


 거처를 옮긴 지 일 년이 되어가는 지금, 여기에 오면서 우린 일 년 후에 꼭 개와 같이 살 수 있도록 아파트로 이사 가리라 마음먹고 현재 사는 곳의 계약도 굳이 일 년으로 찾고 맞춰서 들어왔다. 결론상 우리의 현실은 아직 여기에서 사는 것도 겨우이지만, 운명이 나타난다면 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계약 조건을 바꿔보자고 이곳에 사는 내내 얘기를 했다(우리가 사는 곳은 주인이 세를 낼 때부터 반려동물 금지 조항을 걸었다고 한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는 주인이 동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난 본가에 있는 내 고양이들이 있기에 다른 아이들을 내 품에 들일 마음이 없었다. 헌데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나서는 각자가 우리가 되기 전엔 동물가족과 살았음이 가끔 허전함으로 돌아왔다. 먼저 개를 키우자고 한 건 남편이었지만 난 이전과 같은 실패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었는데도 그 아이들이 내 마음 한켠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어서 지금의 이 책임을 끝으로 더 이상을 생명을 들이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연신 반대를 하다가도 어느새 나도 마음이 동했었나 보다. 내 사랑들과 떨어져 살다 보니 미안함 만큼 허전함도 커져갔다. 


 다행히도 우리가 멀리 이사 갈 적에 내 사랑들은 더 이상 나만의 사랑이 아니었다. 엄마는 꼭 데려가야겠으면 한 애만 데려가라며 자기의 사랑을 과시했기에 난 마음 놓고 100km도 더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왔다. 게다가 가끔 찾아가는 나를 언제나 반겨주었고 전화기로 들리는 내 목소리에 항상 모여든다며 엄마는 꺄르르 웃곤 했다. 그들이 가족이 나 하나였을 때엔 내가 그들의 하나뿐인 사람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전부 우리 아이들의 가족이었다.


  예전에 쓴 임시보호 글의 내 태도와 지금의 내 마음은 좀 달라진 것 같다. 이런 게 사람은 참 간사하고도 바보 같다는 건가 보다. 혹시나 해서 이사 온 이곳에서 하루의 반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내가 개와 같이 출퇴근하면서 있어도 괜찮은지 확인도 해놨다. 지금 사는 곳에서 일 년 더 살기로 했음에도 혹시나 개와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할까 봐 아직도 가끔 부동산을 켜보기도 한다. 여담이라면 부동산을 아무리 봐도 내가 데려오려고 하는 '큰' 개를 이해해 줄 집주인이 많지도 않다.


 여튼간에, 결국 나는 운명이 느껴지면 데려올 것이라는 생각에 종종 sns를 뒤져본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모처럼의 휴일을 만나 낮잠을 자는 남편 옆에 누워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고 있었는데, 연락해봐야 할 것 같은 아이가 눈에 띄었다. 개농장에서 발견된 수십 마리 중 한 마리였다. 무서운 빨간색의 이모티콘이 여러 개 붙어있는 글을 펼쳐보니 임시보호 조건이든 입양 조건이든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부류인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입양하기로 해서 얘는 괜찮아졌을지 댓글을 열어보니 거기에 쓰인 문장 하나가 내 마음을 크게 바꿨다.


   '맞벌이인 저는 얘를 데려오지 못해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입양을 기다리는 이 생명들이 갈 수 없는 환경 조건은 이렇다. 

 - 장시간 집을 비우지 않는 집

 - 원룸이나 오피스텔 등의 평수가 작은 집

 - 혼자 사는 사람이나 신혼부부, 학생


 그래도 우리는 원룸이라기엔 넓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으며, 장시간 집이 비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내가 개와 같이 출퇴근을 하려고 하고, 신혼부부여도 우린..


 아무리 키울 생각이 있어도 조건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임시보호했던 개가 지금 지내는 곳의 환경은 사람이 한 명 이상 집에 언제나 상주하며, 큰 평수의 아파트에다가, 아이들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모자랄 것 없는 가족에, 집 앞 큰 공원이 있어 그곳에 사는 개들이 산책하러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더 잘 입양 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은 단편적일 수 없구나 싶었다. 개를 보내본 나 역시도 좋은 조건이 뭔지 알고 있었다.

 아, 우리는 개를 키우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가구가 아니구나 하고 마음이 팍 식어버렸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 맞벌이 안 하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지 않아 문제라던 지금의 현실에서 그러면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으면서 구조 혹은 유기된 동물을 키울 마음이 있는 가구는 얼마나 될까. 그에 비해 당장 내일이면 안락사 위험에 처해 있다는 반려동물은 얼마나 되지? 


 그럼 개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중상위계층 이상의 환경에서 살지 않을까?



 작년에는 보호소에 있는 개를 데려오기 전에 그들을 위한 노력을 위해 봉사활동을 두 번 정도 갔었다(전혀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집에서 쉬는 것이 좋은 내 성향과 데려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한 큰 움직임이었다는 변명을 두겠다). 그곳에 있는 많은 아이들 중에 한 마리에게 마음이 갔고 난 데려온다면 그 아이를 데려와야지 하면서도 내 상황에선 그 아이가 만족스럽게 지내지 못할 거란 사실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대형견에 털도 많이 빠지고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머리 좋은 종의 그 녀석은 유기된 이후로 오래도록 보호소 좁은 한 칸에서 봉사자를 반겼다. 

 그곳에 봉사를 같이 갈 수 있게 해 준 동생이 내 고민을 듣더니 한 말이 있다. [언니, 아무리 그래도 언니가 데려간다는 게 거기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으로 가는 거야.]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그 보호소는 절대로 나쁜 곳이 아니며 정말 좋은 곳 중 하나임을 분명히 짚고 가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우리 둘이서만 산다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우린 그 불투명한 것을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못하는 것.

 이 중에 옳고 그름은 없겠지. 각자 현재에 열심이면서 행복하면 언젠가는 더 좋은 환경이 갖춰지겠지. 그런데 우리보다도 더 각박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우리도 덩달아 용기가 사라진다는 걸 그 개들은 알까..




 지금 우리 집에는 물생활하는 생명들 여럿과 화분이 하나 있다. 물생활은 몇 년 전부터 나의 로망이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꿈으로만 남겨뒀다가, 남편과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부분으로 우리 생활에 스며 있다. 그리고 저 작고 노란 화분도 동료가 얻어 온 큰 생명에서 떨어져 시작하는 생명을 작업 공간에서 오랜 시간 물에만 키우다가 용기 내어 그중 하나를 집으로 들여와 흙에 정착시켰다. 화분 위에서는 눈에도 잘 안 띄던 떡잎이 이젠 원래 있던 이파리 보다 커져서 오늘 오후 내 추적추적 오는 비에 창문 바깥으로 두 손에 잡아 숨 쉬게 해 주었다.


 생명과 함께 하는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언제쯤 나는 개를 내 삶에 들여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저 TV 속 현실처럼 나도 이렇게만 살다가 가는 게 우리한테도 남들에게도 이 세상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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