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진짜 엄마를 만나다
엄마의 수술 이후 간병하는 동안 함께 보내는 시간은 '대화'로 채워졌다. 39년을 같은 집에서 함께 살다가 8년을 따로 살았는데, 이후 다시 함께 보낸 시간 동안의 대화는 8년을 합한 시간보다 길었고, 그전 39년을 합한다고 하더라도 깊이와 농도에 있어서는 훨씬 진할 것이다. 양적으로는 비교가 무색하게 짧은 시간이지만 압축된 시간의 밀도는 저울로 무게를 잰다면 절대 기울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9남매의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나셨다. 아래위로 형제자매가 있으니 좀처럼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위치였을 것이다. 더욱이 첫째 외삼촌 아래로 두 명의 이모 다음 순서라 바라던 아들도 아니었으니 관심을 받기에 좋은 상황 역시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로 연달아 외삼촌과 이모가 밭은 간격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부모님의 살뜰한 돌봄보다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하는 처지였다. 책가방을 들고 꼬박꼬박 학교에 가는 또래 여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지만 업어달라 매달리는 동생들을 외면하지 못하셨다고 했다. 두 살 위 이모에게 가지 않고 엄마 등만 찾는 동생들이 얄미웠고, 소풍 도시락을 신나게 흔들고 가다 떨어뜨려 못 먹게 되자 잘됐다며 소풍 대신 일을 시켰던 외할머니가 너무 미웠다고 했다. 자라서는 밭일할 때 손발이 맞는다며 엄마를 찾는 외할아버지가 야속했다고도 하셨다.
결석을 밥 먹듯 하면서도 늘 학교에서는 우등상을 받는 분이셨다 하니 학업에 대한 열의와 애정이 얼마나 컸을 지도 짐작이 간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유일하게 못 받은 상이 개근상인데,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었음에도 그렇게 섭섭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홍역을 앓고,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취 수술까지 받았으면서도 개근상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엄마의 의지였다. 지금에서야 그 상은 내가 받은 상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하여 받은 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엄마와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었나 돌이켜보게 된다.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면서, 일상생활 동안 적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엄마는 생각을 거의 거르지 않고 말로 표현하시는 분이시니 양으로 셈하면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떠올려보면 기억나는 것들이 별로 없다. 아마도 그때 나눈 것은 엄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TV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으니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수술과 이어진 항암치료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엄마와의 대화는 온전히 우리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컨디션이 어떠신지, 어디가 불편하신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 어떤 꿈을 꾸셨는지, 드시고 싶은 것은 없으신지...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그런 소소한 것들을 챙기게 되었다. 항암치료받으시는 동안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주사를 맞고 오신 직후 3일간은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 한두 시간 주무시다가 깨어 몇 시간을 잠들지 못하셨고, 잠이 들어도 좋지 않은 꿈을 꾸어 깨어나는 일이 빈번했다. 아마 암 환자들 중에 상당수는 이런 수면 장애를 경험할 것 같다. 이전에 편찮으시기 전에 대화였다면 이런 일상의 질문들을 할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함께 운동장이나 집 근처 개천을 산책하러 가는 길도 대화하기에 좋았다.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의 지난 시간과 현재를 오가곤 했다. 때로는 하천변에 핀 코스모스가 때로는 멀리서 날아온 오리가 단서가 되었다. 단서는 이야기 버튼이 되어 엄마의 과거를 소환했다. 가끔은 산책을 오가는 40여분 내내 하나의 스토리로 채워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지에 가지를 쳐서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전히 엄마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에는 처음 드는 이야기도 있었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던 내용을 자세하게 전후 사정까지 알게 되어 새롭게 이해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오셨는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오셨는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엄마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아 위축되고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기가 죽고 섭섭하기도 했고 너무 강한 엄마라는 생각에 어릴 때는 미운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엄마가 들려주는 시간들의 나이가 되어보니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새삼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 9남매의 4번째 태어난 아이의 유년기는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주지 않았고,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은 헌 옷 밖에 없었으며,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엄마, 아내 같은 사회적 역할로 살아왔을 뿐 독립된 여성으로,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누구 하나 진심 어린 지지를 해 주지 않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건강한 몸과 마음뿐이었으며,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까지 해야 할 만큼 힘겨웠던 삶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행복한 삶이라고 하셨다. 주어진 밭은 척박했지만 당신의 노력으로 일군 밭은 옥토가 되었다. 투병을 하시면서도 병원비 걱정 하지 않을 수 있고, 두 자녀가 각자 제 몫을 하도록 키워내신 것만으로 충분한 성취를 이루셨다며 만족한다고 하셨다.
박수받으며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신 일들이 아니다. 힘들어도 놓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오는 동안 이뤄오신 일들이다. 이제라도 그런 엄마의 시간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감사하다. 엄마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오셨을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내가 콩쥐도 아니면서 엄마가 팥쥐엄마 같다 생각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여유 없이 살아오신 삶을 핀잔하거나 그 때문에 내가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투정을 하는 것으로 영원히 엄마의 삶을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엄마는 얼마나 자신의 삶에 진심이었는지,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비로소 엄마와 진지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서글프지만.... 이렇게나마 엄마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덧. 제목의 배경이 된 사진은 엄마의 텃밭에서 자란 아욱꽃이다. 꽃말이 '은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