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여름의 기억.
빗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몇 초에 한 번씩 치는 번개의 밝기나 이어지는 천둥의 울림으로도 예사 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모님 댁은 구옥이라 내부 하수구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사전에 확인을 하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다. 2차 장마라고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오후에 부모님이 집안 곳곳을 둘러보셨었기에 곧이어 겪게 될 소란은 예상하지 못했다. 엄마가 늘 본방사수하는 저녁 일일연속극을 보던 중에 빗소리가 커서 창문을 닫았다. 다시 한번 점검하러 아래층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10분 후면 드라마가 끝나니 그때 같이 내려가서 둘러보자고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네? 뭐라고요?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반 지하 방 한 곳에서 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전화였다. 가보니 그 집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방 한 곳에는 이미 빗물을 퍼내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머릿속은 멍하고,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했다. 어디든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입에서 머리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서울시 다산콜센터의 이름은 전화가 연결되고 나서야 수신인의 첫마디에서 확인했다.
두어 곳의 연결을 거쳐 겨우 연락이 된 곳은 처음에 바로 전화했을 때 신호만 울리던 주민센터였다. 다행히 연결되어 상황을 설명했는데 아무도 지원을 나올 수는 없다고 했다. 양수기라도 빌릴 수 있냐고 하니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빗속에 아버지께 자전거를 타고 가서 빌려오시랄 수도 없고, 결국 마음 급한 내가 뛰어가야 했다. 전화로 확인하기에 5kg 정도 되는 무게라고 했는데 급한 마음에 뛰어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양수기를 한 손에 들고 300여 미터 골목골목을 달려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쇳덩어리이기만 하다면 바닥에 내려놓기라도 하겠건만, 전기 플러그가 달려 있는 양수기에 쏟아지는 비를 맞게 할 수도 없었다. 플러그가 젖지 않게 양수기를 가슴에 안고 달려왔는데 돌이켜 보면 어떻게 들고 왔는지 모르겠다.
양수기만 있으면 빨리 고여 있는 물을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예상과 달랐다. 비 때문에 전원이 차단된 것이다. 콘센트가 물에 젖으면 화재 예방을 위해 전원이 자동차단 되는 터라 양수기가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다른 곳의 전원을 끌어서 쓴다고 해도 멀티탭을 써야 하는데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도구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인데 방에 물은 발목까지 차올랐다. 바닥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불과 전기장판은 이미 물을 잔뜩 먹고 다른 가전제품들이 젖지 않도록 쌓을 수 있는 공간에 올려보았지만 아수라장이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세숫대야든 그릇이든 직접 물을 퍼 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수구가 세 개나 있었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폭우로 하수구가 역류하는 상황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비는 더 거세게 퍼붓고, 빛도 없는데 손으로 더듬어 하수구를 찾았다. 손에 닿는 것은 주변으로 밀려드는 흙이랑 쓰레기들. 그것들을 걷어 내면서 세숫대야로 빗물을 가득 담아 집 밖으로 퍼냈다.
3시간가량 조금도 쉬지 않고 작업을 한 결과 뒤쪽 지하 하수구 쪽에는 평소처럼 바닥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방에 들어온 빗물을 빼는 것은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다음 날 아침에 작업을 하기로 했다. 1층 방 한 곳이 공실이었기에 피해가 컸던 두 방의 세입자들은 그곳에서 비를 피하도록 하고 집으로 올라오니 이번에는 거실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에어컨 실외기가 연결된 선을 타고 빗물이 들이쳐서 거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바닥에 깔아 두었던 스티로폼 장판을 걷어 내고 여러 번 걸레질을 했다. 비에 젖고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이 물은 잘 내려갈 것인지...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겨우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지만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에 자다 깨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밝을 때 일어나서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6시에 알람을 맞췄는데 벨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의 휴대폰으로 5시에 전화가 왔다. 온통 젖은 온가지와 이불을 빨아야 한다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가 들어오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방에 가서 확인을 하고 콘센트 주변 물기를 제거한 후 차단되었던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다행히 전원은 회복되었다. 엄마는 그 길로 주민센터로 가셨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청하러 가신 엄마는 젊은 남자 공무원 세 분과 함께 오셨다. 그분들도 밤새 다른 집 지원을 나가서 작업을 한 탓에 완전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지쳐서이기도 하겠지만 피지컬만큼 요령이 없어서 전날 밤 이모부와 내가 하던 작업 속도보다는 더뎠다. 그래도 이렇게 와서 도와주는 것이 고마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판 위에 물을 퍼내다가 장판을 걷어 내고 닦고 이 작업을 수십 차례 했다. 수건으로 물을 적셔 짜내고를 하도 반복해서 나중에는 누가 젖은 수건이라도 짜 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최대한 물을 빼낸 후에 창문과 방문을 열고 보일러를 켰다. 남은 것은 사람의 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일러와 자연 바람이 할 일이었다.
그렇게 물을 다 빼고 났더니 다음은 근육통이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과 범위에 성난 통증이 밀려왔다. 하기야 그런 일을 경험한 것이 처음이었으니 그런 근육통을 처음 겪을 수밖에... 오른팔은 고무팔이 된 것처럼 왼팔보다 늘어난 느낌이고, 팔꿈치 안쪽은 아우성이었다. 그리 무겁지 않은 것도 들기가 힘들었고, 심지어 세수나 이 닦는 일도 힘들었다. 내 마음으로 팔이 움직여지지 않아 두 손으로 세수하기가 어려웠고, 칫솔질은 두 손으로 해야 했다. 피로회복제와 근육통을 덜어주는 약을 먹었지만 자려고 누워도 몸을 뒤척이기도 힘들었다.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인 화요일도 아팠지만 3일째 수요일은 더 고통스러웠다. 집안에서 걷는데도 의도하지 않게 어기적거렸고 설거지를 하려고 그릇을 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수요일. 북토크가 있는 날이 다가왔다. 바로 며칠 전 후배로부터 ‘파친코’라는 소설의 이민진 작가의 북토크 소식을 듣고는 참가 신청을 했었다. 작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작품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특강처럼 강연만 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솔깃했었다. 신청을 하긴 했지만 코로나도 다시 기승이고 세종대 대양홀에서 하는 행사라 천 명이상의 인원이 실내에 모이는 것을 생각하니 당첨이 되지 않아도 합리화하기 좋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평소라면 추첨운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데, 덜컥 당첨 문자가 왔다. 집에서 행사장까지 지하철로 1시간이나 걸리니 왕복 두 시간을 이동하고 또 두어 시간은 행사가 진행될 텐데 그만큼 움직일 수 있을까. 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일까. 근육통이 시작되고부터 계속 마음속 전쟁이 일었다.
북토크가 있기 전 날 화요일 저녁, 엄청난 폭우에 안부를 물으러 친한 선생님이 톡을 주었다. 그 전날과 오전까지 있었던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전하고 나니 선생님은 북토크에 다녀오길 권하셨다. 웬만하면 다녀오는 것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거라시며. 몸은 쉬기를 원했지만 내 마음과 머리는 길을 나설 것을 원했다. 누워있으면 고통에만 집중되어 몸이 더 아플 것 같고, 그러면 마음이 더 힘들 것 같았다. 고통이 느껴져도 몸이 아파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가게 된 북토크. 행사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저녁 7시까지 입장이었는데 15분쯤 남기고 도착하니 2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훨씬 뜨거운 열정으로 작가를, 작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2시간가량 이어진 북토 크는 2부 형태로 구성되었는데, 초반 40분 동안에는 사전 질문 중에 진행자가 질문을 골라서 물으면 작가가 대답하였고, 이후부터는 현장 Q&A로 진행되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작가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작가의 작품이 서른 개가 넘는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북토크에서 대다수의 질문자가 영어로 질문하는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녀를 시부모님에게 맡기도 나왔다는 여성, 하루 휴가를 쓰고 왔다는 직장인, 싱가포르에서 또 미국에서 와서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질문자들의 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작가와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질문인 만큼 답변의 내용이 참 좋았다. 작품의 배경이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고 있고, 주인공의 자녀가 재일교포로 성장하게 되는 만큼 일본과 관련된 질문이 몇 개 있었다. 질문 중에 여전히 우리 아픈 역사 속 사실들에 깊은 반성과 사과가 없는 일본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알 수 있었던 답변이 있었다. ‘다음 세대들에게 전한다면 혐오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늘 피해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감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면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설령 과거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는 희생자였다고 하더라도 그 위치에만 우리가 머무른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역사 속에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새롭게 하고 있는지, 또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물론 과거를 청산하고 아픔을 돌아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상처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될 테니까.
지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서면서 막연히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홍수로 잠긴 집과 그 집에서 정신없이 물을 퍼 내던 내 모습에만 젖어있고 싶지 않았다. 홍수가 집을 적시고 잠기게 했을지언정 내가 홍수가 빠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스스로가 과거의 희생자가 되어 혐오의 감옥에 갇히지 말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 울림이 있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지난 2년 간,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는 교만이나 오만이 아니라, 혼자 두 분을 모두 돌봐야 한다는 희생자가 아니길 바랐다. 희생자나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홍수에 잠겼던 일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북토크에 참여하고 있는 현재는 또 다른 세상이다. 내가 바랐던 것처럼.
홍수와 북토 크는 그렇게 씨줄 날줄처럼 겹쳐진 시간이었다. 통증에만 집중되어 나를 한없이 불쌍한 사람으로 놓이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통증을 받아들이고 집을 나선 순간 또 다른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는 이런 말도 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역사나 맥락, 연결 없는 정체성이라고 하면 의미 없는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우리 모두가 조상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 또 조상의 경험과....’ 나의 정체성은 나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다. 넓게는 우리 역사 속에, 좁게는 나의 가족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엮어진 맥락과 연결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특출 난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도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다 살면서 특별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한다. 또 우리의 평범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영광이다.’라는 말도 했다. 깊이 공감한다. 어쩌면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특별한 특출 난 사람은 아니지만 특별한 순간들을 경험한다. 이번 홍수처럼.
나는 ‘나’라는 텍스트에 최고의 작가이자 독자이다. 특별하지 않더라도 특출 나지 않더라도 나의 특별한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순간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 홍수와 북토크를 연달아서 경험하는 일이 결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지만 그런 장면들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홍수에만 잠기기 않았던 것처럼 또 다른 형태의 북토크 같은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또 희생자가 아닌 성실한 작가로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면서 이런 비유가 떠올랐다.
나는 잘 익은 새빨간 딸기가 듬뿍 들어간 달콤한 케이크를 원했다. 하지만 신이 나에게 던져 준 것은 늙은 호박이었다. 내가 원한 건 딸기였지만 늙은 호박으로 어떻게 딸기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주어진 늙은 호박을 두고 투덜대고 투정을 부리고 있자니 늙은 호박마저 점점 더 시들해진다. 어떻게 할까? 나는 선택했다. 늙은 호박으로 할 수 있는 호박죽을 끓이자고. 달콤하고 상큼한 스트로베리 케이크는 아니지만 구수하고 부드러운 호박죽을 맛있게 만들어 먹자고. 케이크는 못 먹어도 호박죽은 먹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