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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Sep 04. 2024

10년 후의 일기, 타임캡슐 봉인 해제

현재_10년 전의 미래, 10년 후의 과거

오랜만에 연구실을 정리했다. 사용하는 공간이 넓지 않아 틈틈이 정리를 한다고는 해도 언제부터 그 자리에 쌓여 있었는지도 모를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눈에 보이는 곳에 놓인 것들은 자주 치운다고 치우는 편인데, 커다란 철제 3단 서랍장 안은 그야말로 잡동사니 천국이었다. 


서랍 안에는 교내외 기관 안내와 홍보용 브로우셔가 다채롭게 가득했고, 각종 행사에 참여했을 때 사용했던 이름 목걸이는 언제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모아둔 건지(?), 스무 개는 족히 되는 듯했다.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수년 전에 받아 놓고 사용하지 않은 연하장도 서너 묶음이 숨어 있었다. 그나마 쓰다 만 색지 더미랑 포스트잇 같은 문구류는 소용이 닿을 것 같아 반가웠다. 


묵은 먼지들 사이로 수년 치 다이어리와 탁상 달력들을 꺼내어 들춰보았다. 여러 기념일과 생일,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해서 썼던 메모들, 학생 지도 하면서 적어 둔 개인정보들이 적힌 부분들은 세절하기  위해 따로 구분했다. 요즘엔 휴대폰이나 태블릿 PC, 같은 곳에 메모 기능들이 잘 되어 있어 다이어리나 탁상 달력의 사용이 예전만 같지 않지만, 꾹꾹 눌러쓴 손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 시간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런 묵은 시간 속에 보석 같은 시간을 담은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했던 과제 중의 하나인 ‘10년 후의 일기’를 모아둔 봉투였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생들과 했던 수업 중 한 과목에서 매주 1시간씩 소그룹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맡고 있는 과목들이 대체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관계에 관한 것들을 다루고 있었던 터라, 학술적인 내용을 이론적으로만 다루기보다는 자신을 탐색함으로써 사람과 관계에 대해서 알아가기를 바랐다. 외과의사는 메스를 잘 다루어야 하고, 연주자는 악기를 잘 다루어야 하듯이 사람을 성장시키도록 돕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가 도구가 되어야 한다(이런 생각은 학부 때부터 좋은 스승님들께 배운 덕분에 자리 잡은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고 있다). 


당시 그 수업은 3학점짜리 3학년 교직과목이었는데, 교직이수 중인 학생 외에도 일반 학생들이 함께 수강하고 있었다. 매주 1시간씩 진행하는 소그룹 활동은 ‘자기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9차시 분량으로 구성했었다. ‘10년 후의 일기’는 그 프로그램의 8차시에 해당했었다. 2014년 당시 3학년 수업이었으니 20대 초반의 풋풋한 학생들이었고,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한참 선배미를 과시하던 남학생들조차 25살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10년 후의 일기’라니! 2024년이 과연 오기는 올까, 서른 즈음조차 멀게만 느껴졌을 그들에게 10년 후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먼 미래였을 것이다. 평소에는 과제라면 그다지 반기지 않는 학생들이었지만, 제출했던 것을 타임캡슐처럼 묻어 두고 10년 후 개봉하겠다는 제안에는 조금 솔깃했던 것 같다. 어떤 내용이든, 10년 후 하루를 떠올려 보고, 그날의 일기를 써서 제출하면,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10년 후 되는 시점에 개봉해서 각자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철제 서랍장 맨 아랫 칸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누런 봉투 속에는 그렇게 2014년 6월, 2014년 12월에 학생들이 쓴 일기가 들어 있었다. 

2014년 6월에 쓴 10년 후의 일기들

훔쳐본(?) 학생들의 일기에는 이미 멋진 배우자를 둔 남편과 아내가 되었고, 벌써 아이가 둘에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되어 있기도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소속된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아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심이 되거나, 몇 번의 실패를 발판으로 창업한 회사에서 여러 개의 특허를 내고 중견기업의 사장이 되어 있기도 했다. 10년 전에 데드리프트 100Kg을 거뜬히 들었던 남학생은 매일 예쁜 와이프에게 뽀뽀하는 스위트한 남편이 되어 있었고, 고3 학생의 진로 상담을 하는 바쁜 하루를 보낸 교사가 되어 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가 하면, 당시 가족의 일로 고민이 있던 한 학생은 그 고민들이 조금 해소되었을까? 

2014년 12월에 쓴 10년 후의 일기들(편지를 쓴 학생도 있다 ^^;;)

한 장 한 장 일기를 읽다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일기의 주인공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빈약한 체력이지만) 나름 열정이 있었던 10년 전의 내 모습도 영상처럼 떠올랐다. 이제 혼자만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타임머신을 탈 때가 되었구나. 함께 만나서 개봉했다면 더 뜻깊었겠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 아마 한참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나이들일 테니 대신 타임머신 티켓만 선물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일기를 스캔했다. 이제 한 명씩 탑승시킬 시간. 휴대폰 SNS 계정으로 한 명씩 차례대로 연락을 했다. 


“똑똑... 혹시 **대 졸업생 00 계정 맞나요?” 


졸업생 두 명은 어느 새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최근 근황으로 이어졌고, 타임캡슐 개봉기에 이르렀다. 졸업 후 각자의 시간으로 바쁘게 지냈던 학생들은 모두 과거 그 순간을 떠올리며 나른했던 오후를 깨우는 것 같았다. 첫 줄만 읽고는 오글거려서 차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학생, 뭔가 진지한 내용을 썼을 것 같다며 퇴근길에 차분히 열어 보겠다는 학생...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너무 엉뚱한 내용을 쓴 것 같다며 혼자 큰 소리로 웃고 있다는 학생, 금세 다 읽고는 내용이 소름 끼치도록 맞아서 놀랍다는 학생도 있었다. 마침 그 학생의 일기엔 결혼한 지 두 달 된 신혼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실제로 두 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쳤다고 해서 같이 놀랐다. 원하던 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공공기관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5년 차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그녀는 조만간 10년 후의 일기를 다시 써보고 싶다고도 했다. 

일기라는 것이 각자의 날들이기에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서로 달랐지만, 그날 우리 모두 같은 타임머신을 타고 10년이라는 시간을 여행했다. 20대의 풋풋한 학생들은 이제 30대의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고, 철부지 같던 모습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자리 잡아가는 듯했다. 학생이라는 역할도 벅차게 느껴졌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내로, 남편으로, 직장의 초급 간부로 또 다른 역할을 착실히 해 나가고 있는 그들이 대견했고, 근황을 듣고 안부를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뿌듯했다.

오늘 개봉한 10년 후의 일기는 10년 전의 미래였다. 오늘은 또 10년 후 미래 어느 날의 과거이기도 하겠지. 과거든 미래든 시간은 흐르는 것도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편의상 지금이 아닌 지난 시간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일 뿐. 타임캡슐을 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기분을 내기는 했지만, 정작 타임머신이라는 것을 탈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현재에 있기 때문이었다. '10년 전 그때는 이랬지... 10년 후 미래는 어떨 거야...'라고 기억을 더듬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것도 내가 지금 깨어 있고, 살아 있어서 가능한 것이겠지.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재일 뿐이라는 생각. 타임캡슐을 열면서 새삼 오늘을, 이 순간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오늘, 10년 전의 미래에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보내며, 10년 후의 나는 오늘을 또 이렇게 추억할 수 있을까? 


학부 때 ‘인간과 미래’라는 교양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30년 후의 오늘을 과제로 냈었다. 수년 전 이삿짐 정리를 하다 어디선가 케케묵은 그 과제물이 다른 물건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것을 본 것 같다. 30년 먼지를 고스란히 둘러쓴 채. 이번엔 나만의 타임캡슐 봉인을 해제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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