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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 Perich Nov 29. 2023

너희가 좋다면 우리도 좋다


어제, 이브닝 근무를 하는데 신랑에게서 길이 미끄러우니 운전 조심하라는 카톡이 왔다. 일하느라 몰랐는데 오후 늦은 시간부터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밤 11시 30분,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제법 많은 양의 눈이 도로에 쌓여 있었다. 기온도 영하 10도까지 떨어져 신랑의 말대로 도로는 빙판길이었다. 속도를 줄여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Spotify에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흘러나왔다. 우울해진 지금의 내 심정과 묘하게 잘 맞는다 싶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솔직히 조금 울었다.

정말... 겨울이야?
이제... 진짜로 시작인 거야?

눈이 조금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인데 막상 길 위에 쌓인 눈을 보자 우울해졌다. 우리의 선택으로 가족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여기에 살고 있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참고 살아야지 하다가도, 살을 에는 추위에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놈의 눈을 전부 태워 없애버리고 싶다(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전부 산산조각 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다(부서지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새벽 한 시쯤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30분. 단잠을 자고 있는데 만두가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빨리 일어나서 밥 달라고, 밖에 나가서 놀자는 무언의 신호였다. 병원 실습 때문에 신랑이 아침 일찍 나가고 집에 없었으니 나를 집중 공격한 것이리라. 만두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어쩔 수 없이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뒷마당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실외 배변을 위해 밖으로 나온 만두와 하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마당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바닥에 쌓인 눈을 반겼다.



하나는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유명한 벨지안 마리노이즈(Belgium Malinois, 강형욱 훈련사님의 개와 같은 견종) 피가 섞인 믹스견이라 털이 짧다. 다른 마리노이즈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짧은 털 때문인지 은근히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한다. 여름엔 헥헥거리며 맥을 못 추리는 날이 많은 반면, 겨울이 되면 기운이 넘쳐나는 날다람쥐처럼 온 마당을 쏜살같이 뛰어다니니 말이다.


하나가 웃는 상이 아니라서 매번 사진을 찍으면 무언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지금 하나는 최고로 신난 상태이다(내 손에 들린 공에 초집중한 하나)


만두는 두말하면 잔소리. 이중모의 웰시코기라 추위에 강하기도 하고, 도톰한 발바닥은 강철 젤리가 붙은 것처럼 눈 밭을 안방처럼 헤집고 다닌다. 동굴 탐험을 하듯 눈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 쉼 없이 냄새를 맡기도 하고, 터널을 파듯 앞발로 눈 속을 파헤치고 들어가기도 한다. 하나도 하나지만, 만두의 활동량과 에너지는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


과도하게 귀여운 만두


아침 식사 후,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뒷마당으로 나갔다. 아침 내내 기다려왔던 공놀이를 시작한 만두와 하나는 최고로 신이 났다. 눈 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을 물고 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래, 너희가 겨울을 좋아하지.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조금 추워도, 눈이 많이 와도
너희가 좋다면 우리도 좋은 거지 싶은 생각에 어젯밤 우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정말 사랑한다, 우리 만두 그리고, 우리 하나! 올 겨울도 재미있게 보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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