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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 Perich Dec 07. 2023

김치전과 막걸리(Makeolli)

소심함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의도를 증명하거나 변론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하곤 한다. 우호적인 관계에서,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야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갈등과 긴장의 상황에서 자신의 의도나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특히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내향적으로 바뀌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제법 외향적이고 직설적이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남의 눈치를 보고 소심하게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가 바로 나에게 해당한다. 어렸을 때는 내가 옳다고 믿거나, 내가 해야만 하는 말이나 행동이라면 거침없이 해버리고 잊어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성격이 변하더니 이제는 앞에서는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 혼자 끙끙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몇 날 며칠을 머릿속에서 수천 가지, 수만 가지의 가상 시나리오를 그리고 혼자 싸움을 한다.

다음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사과를 받아야지.
다음에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야지.
다음에도 이렇게 오해를 살만한 일이 생긴다면 똑 부러지게 맞받아쳐서 절대로 억울한 일은 당하지 말아야지.

내 머릿속에의 나는 지성과 논리를 겸비한 유창한 웅변가이며, 대단한 지식과 지혜로 무장한 유명한 철학가이며, 정의롭고 올곧은 뚝심 있는 투쟁가이다.

실상은 앞에서는 말도 못 하고 얼굴만 새빨개져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 혼자 씩씩거리며 이불 킥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며칠 전, 최근에 새로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된 간호사의 편의를 봐주다가 내가 오히려 오해를 받는 일이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닌 일에 상대방은 굉장히 언짢아했고, 졸지에 나만 나쁜 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그 후 이틀 내내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오해였다고 명확하게 설명해야지 싶다가도 그게 그렇게나 화를 낼 일인가? 같은 팀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에 저렇게까지 과도하게 흥분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속에서 불같은 전쟁이 일어났다.

별것도 아닌 일에 그렇게 흥분할 일이야?
새로운 부서에 갓 일을 시작한 사람의 편의를 봐주려고 했던 내 의도를 그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해?
우리가 같이 일한 햇수가 몇 년인데 아직도 나를 몰라?
오래 같이 일을 해온 만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어?
그리고, 일 조금 더 하는 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야?
주말 이브닝 근무는 정말 한가하잖아? 콜 하나 더 받는 게 그렇게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억울한 일인 거야?
너도 실수할 때도 많고, 그날은 출근도 늦게 했으면서 다른 사람에겐 완벽을 강요하는 건 무슨 심보야?
....

묻고 싶은 말들이 수십, 수백 가지는 떠올랐다. 억울하기도 하고,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직장동료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그 상황에서 왜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곤조곤 설명하지 못했을까.
상대방의 반응에 마음이 상해서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었을까.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 왜 나는 명확하고 논리 정연하게 내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을까.

화가 나면 화르르 흥분을 해서 앞뒤 문맥도 맞지 않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유치하고 쪼잔한 감성적인 변명거리가 대부분이다.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고, 내가 말을 하면서도 '아... 나라는 인간 진짜 볼품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래도 내 할 말은 똑 부러지게 딱딱 잘했었던 것 같은데...
나 왜 이렇게 됐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들 눈치를 봤지?

제2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쩌면 큰 요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 언어를 사용하면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인가? 그래도 한국말로 하면 나름 고급 어휘도 써가면서 그럴듯하게 맞받아칠 수 있는데, 영어로 말하니까 내 어휘가 너무 유치해서 그런 건가?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한국말로 해도 줄 끊어진 아쟁처럼 목소리는 떨리고, 3살짜리 아이가 작사한 노래처럼 얼토당토않은 말을 쏟아내곤 했었으니까.

갈등 상황에서 조곤조곤 자신의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심을 넘어 경외심까지 든다.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는 거지? 무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굽신거리지 않는 저런 어휘는 어떻게 선택하는 거지? 선을 넘지 않으면서 어쩜 저렇게 자신의 입장을 완벽하게 변론할 수 있는 거지?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고 손바닥에 땀도 안 나고 목소리를 떨기는커녕 더 중후하고 차분한 말투까지... 나는 저 상황이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온몸이 쿵쾅쿵쾅 앞뒤로 흔들릴 것 같은데... 진짜 대단하다...

심장에 강철 갑옷을 입힌 듯한 그런 사람들과 나는 참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개미 똥보다 작아진 심장을 부여잡고 술상을 차렸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다시 가상의 시나리오를 쓴다. 다들 내 앞에서 찍소리도 못한다. 타당한 예를 들어 내 입장을 변론하고, 억지 논리를 펴는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준다.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고, 목소리도 떨지 않으며 흥분하지도 않는다. 할 말만 똑 부러지게 하고 당당하게 내 할 일을 한다. 나는 다시 웅변가가 되었다가 철학가, 투쟁가가 된다. 더 나아가 유관순 열사도 되었다가, 김구 선생님도 되었다가, 나중에는 초연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법정 스님이 되기도 한다.

......

...... 에잇!!

혼자서 이러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술이나 마셔야지. 젠장.




근처의 Liqure Store에서 산 HANA 막걸리.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생산하는 막걸리인데 가벼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이 진득한 느낌에 도수도 꽤 높았다. 원래 가벼운 느낌의 술을 좋아해서인지 솔직히 좀 별로였다.



그리고 최근 미국으로 진출한 홍진경 김치로 만든 은혜로운 김치전. 역시 김치가 맛있으니 김치전도 맛있구나! 진경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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