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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 Perich Dec 18. 2023

비 오는 겨울밤, 길 잃은 개를 만났다


지난 금요일,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병원을 나오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라는 눈은 안 오고 12월 중순에 이런 폭우라니! 당연히 우산 따위는 없었으니 주차장을 향해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출퇴근용으로 입는 가벼운 재킷과 얇은 유니폼은 채 2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미 흠뻑 젖어버렸고, 영하 1~2도 되는 날씨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혼자 구시렁거리며 차의 히터를 최고로 틀었다.

'12월에 무슨 비야... 이거 얼어붙으면 사고 엄청나겠네...'

밤 11시 30분.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사워를 하고 싶단 마음뿐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비가 오는 데다 안개까지 자욱하게 껴서 평소보다 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런 날 갑자기 사슴이라도 튀어나오면 백발백중 큰 사고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열심히 주변을 살피면서 말이다.

병원이 있는 도심을 벗어나니 도로가에 지나다니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날씨가 이러니 금요일 밤이라도 어디 나가고 싶지가 않은 거지...'

그때였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건물 옆에서 하얀색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 뭐지? 늑대인가?'

내가 사는 지역은 밤이 되면 도로가에 간혹 야생동물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겨울에는 더. 갑자기 도로가로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도를 한껏 줄이는데 그 하얀 동물이 내 차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강아지잖아!!!'

진돗개 정도되는 크기의 하얀색 강아지였다. 놀란 마음에 서둘러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켠 뒤, 밖으로 나갔다. 비에 흠뻑 젖은 개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내 옆으로 다가와 낑낑 우는 소리를 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로 트렁크 문을 열었다. (참고로 내 차는 SUV 라 트렁크와 차 내부가 연결되어 있다) 래브라도 믹스처럼 보이는 개는 망설임 없이 차 안으로 뛰어올랐다.

다시 차에 타서 강아지 상태를 살폈다. 온몸이 비에 젖고 추위에 떨고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상처가 있거나 학대를 받은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영양상태도 좋아 보이고 털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털의 눌림 방향으로 보아 목에 넥 칼라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주인이 있는 개 같은데...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고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은 집에 가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자 싶어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에서 개는 불안한 듯 이쪽저쪽 창문을 두리번거렸다.



'자기 집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건가?'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밤 12시가 다 된 시간. 차고에 개를 풀어주고 물과 사료를 건넸다. 하지만 긴장을 한 것인지 슬쩍 냄새만 맡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깨끗한 수건으로 비에 젖은 털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여전히 낑낑거리기는 했지만 꼬리를 흔들면서 내 손을 핥는 너무 예쁘고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신랑과 만두, 하나는 안방에서 자고 있고 차고에는 낯선 개가 있다. 신랑을 깨울까도 생각했지만 이 밤에 신랑을 깨우면 만두와 하나도 깰 것이고, 둘은 또 낯선 개를 향해 엄청 짓어대겠지... 그러면 안 그래도 불안하게 여기저기 살피는 이 개는 더 불안해할 테고...

같이 이브닝 근무를 했던 직장동료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니 페이스북에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나 주웠을 때 공유하는 페이지가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 계정이 없는 나는 직장동료에게 사진과 글을 올려줄 것을 부탁하고 혹시나 비슷한 사진이 올라온 것이 있는지 일일이 살폈다.

20분 정도를 차고에 쭈그리고 앉아 살폈지만 비슷한 사진이 올라온 것은 없었다. 아무리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차고라지만 나도 온몸이 비에 젖은 상태라 점점 한기가 들었다.

'혹시 누가 유기를 한 건가?'
'강아지 문으로 잠시 소변보러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은 아니었을까? 집 가는 길을 아는데 괜히 내가 차에 태워서 데려온 건 아닐까?'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시어머니 댁에 가야 하여 는데... 지금... 벌써 12시 15분인데... 어떡하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무척이나 당황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 우선은 내가 개를 주웠던 곳으로 다시 가보자. 주인이 주변을 돌면서 찾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개가 집으로 가는 길을 알 수도 있으니까.'

다시 개를 차에 태워서 그 근방을 30분 넘게 돌아다녔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은커녕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다.

'차에서 개를 내려줘 볼까? 집으로 가는 길을 알지도 몰라.'

용기를 내서 개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개는 불안한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딱 붙어 섰다. 여전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우산이나 우비를 가져오지도 않았고, 두꺼운 재킷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못한 나는 낯선 개와 함께 비를 쫄딱 맞으며 주변을 서성였다.

'하....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다시 집으로 가서.... 신랑을 깨워야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때였다.
기적처럼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괜찮아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놀란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나와 길가에 선 강아지를 살폈다.

"저 이 강아지 산책하는 거 본 것 같아요. 저도 이 근처에 살거든요. 근데 이 개가 제 강아지랑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기억이 나요. 주인이 있는 개예요. 근데... 잃어버린 개를 어떻게 찾아주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시만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한번 물어볼게요."

그 개는 어느새 그 낯선 여자의 차 뒷좌석에 올라타 있었다. 얼마나 추우면 저럴까...

시드니라는 이름의 여자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조언을 구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내 직장동료가 말했던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고 경찰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강아지를 찾았는데 경찰에게 전화를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시드니는 우리가 강아지를 보호할 수 없을 경우에는 경찰이 보호하고 후속 조치를 취한다며 엄마 말이 맞다고 했다. 그 사이 나는 오늘 밤 문을 연 당직 응급 동물 병원을 검색했다. 만약 내장 칩(Chip)이 있다면 동물 병원에서 주인의 집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시드니가 경찰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정보를 종합해서 곧 경찰을 그곳으로 보내던지, 다시 전화를 해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시드니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 괜찮아요?"
"네? 아.... 좀 추워요."

그도 그럴 것이 추운 날씨에 계속 비를 맞고 있었더니 온몸이 말도 못 하게 떨렸다.

"그쪽 입술이 너무 파래요."

얇은 유니폼은 이미 다 젖은 상태였고 머리카락에서도 막 머리를 감은 것처럼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경찰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내가 이 강아지랑 여기서 기다릴게요. 소피씨는 얼른 집에 가서 몸 좀 녹여요. 큰일 나겠어요."

그녀의 친절함이 무척이나 고맙기는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 여자가 개를 훔쳐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괜한 노파심이 들어 뒷좌석에 앉은 개를 한 번 더 살폈다. 내 표정을 읽은 듯한 시드니는 안심하라는 듯 자신이 사는 곳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 유니폼을 보니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자신도 시내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을 한다며 반갑다고 했다.

'그래,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더 밖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알고 싶어서 그러는데, 혹시 나중에 제 번호로 연락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내 요청에 시드니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전기가 오듯 저릿저릿했다.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시드니였다.


<직역이라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세상에!!! 너무 잘 됐어!!!

그날 밤, 뜨거운 차를 마시고 전기담요에 이불 세 개를 덮고 잠을 청했지만 한기 때문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고생을 하다가 겨우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고 시어머니 댁에 가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밤새 있었던 일을 들은 신랑은 위험한데 자기를 깨우지 그랬냐며 타박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일 했다며,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준비를 하고 오전 8시쯤 시어머니 댁으로 향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언제 눈으로 바뀌었는지 도로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 치우는 트럭이 이미 도로의 눈을 치운 걸 보면 새벽에 제법 눈이 많이 온 모양이었다.



개가 어젯밤에 계속 밖에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었겠구나...

시어머니 댁에서 이른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막 끝냈을 때쯤 내 폰으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Kaya를 케이야, 캐야, 카야라고 발음하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카야가 마음에 들어서 내 마음대로 카야로 발음하기로 했다. 역시 직역이라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에 올린 사진과 동영상을 주인에게 보내주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다행히 나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


해피엔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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