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경(Immersions)
당신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으시나요? 당신 안에서 찾으시나요? 아님.. 밖에서 찾으시나요? 여기 나이지리아계 영국작가 툰지 아데니 존슨은 자신의 독특한 감성으로 예술적 탐구를 통해 주체성과 자율성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꽃잎 혹은 잎사귀처럼 보이는 것들이 현란하게 반복되는 독특한 패턴, 그리고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까지 갤러리 입구에서 멀리 서봐도 단번에 눈에 띄었습니다.
현재 툰지 아데니 존슨 개인전은 <무아경(Immersions)>이라는 타이틀로 오는 2월 22일까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이름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텐데, 한국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진다고 합니다. 주로 뉴욕을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요. 작가님은 아프리카 출신인 만큼 주체성과 전통성 그리고 개인사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표현합니다. 작품들이 강렬한 색상과 율동감으로 만들어 내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관람객들과 소통하죠. 사실 많은 전시회를 다녀봤지만, 아프리카의 예술작품들은 처음이라 매우 신선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아프리카의 신성한 의식을 하는 모습이나 작가 자신의 뿌리인 요루바 민족의 전통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정체성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룹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통회화에 나올법한 스토리텔링이죠. 하지만 전통회화의 성격과는 달리 작가님의 기법은 매우 현대적인 기법이라는 게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님은 디아스포라 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서 '디아스포라'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본토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난민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화는 본토지역 사람들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죠. 사실 미술계에서 디아스포라 적 정체성을 가진 작품들은 '환경 미술', '인공 지능(AI) 예술'과 더불어 2024년도 미술 트렌드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번 개인전은 총 11점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인 만큼 작가님은 서울의 맥락과 호응하는 새로운 연작을 구상했다고 전합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은 <Pearl White Cradle>입니다. 작품의 제목답게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면 전통 의상과 직물에서 나온 듯한 색감처럼 보였어요. 밝은 색은 되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요. 작품 속 패턴들은 작가님의 정신적 뿌리인 요루바족의 전통 문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집 입구 쪽에 작품을 걸어놓으면 아프리카의 전통 신들이 저를 수호해 주고 행운이 가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가님은 이 작품에서 Pearl White색을 사용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서울 아침 하늘에 보이는 흰 안개와 우리나라 문화에서 하늘과 절제를 상징하는 색으로 보였다고 전했습니다. 새삼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워줘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펄 화이트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Pearl White Stem> 인데요. 사실 얼핏 보면 처음에 소개한 <Pearl White Cradle>과 비슷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작가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영감을 받아 펄 화이트의 연작을 이번 전시에 선보였습니다.
앞의 작품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더 많은 분홍빛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면서 작가님의 의도와는 달리 사계절 중에 '봄'을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작품 속 분홍색 꽃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죠. 잘 배합된 색상으로 겹겹이 쌓은 이러한 세심한 과정을 통해 자연의 움직임을 회화로 표현한 작가님의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두 작품을 비롯해서 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꽃잎과 잎사귀가 가득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는 신체가 있다고 전합니다. 툰지 아데니 존슨은 먼저 캔버스에 사람을 그리고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채색한 꽃잎을 겹겹이 쌓아 작업을 합니다.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색이 바뀌기도 해서 작품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터뷰를 보면 “이미 색을 전부 칠한 작품 위에 추가로 더 드로잉을 한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작품은 몇 개월 정도 방치한 후 다른 것이 보일 때 또다시 작업을 시작한 작품도 있다고 전합니다. 어쩌면 이번에 신작으로 전시된 작품도 사실은 완성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다음으로 인물들이 나오는 작품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자신들의 부족 전통춤을 추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잘 나타냈다고 보이는데요. 언뜻 보면 과감한 컬러와 콜라주, 컷아웃 기법 때문에 앙리 마티스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문화 특유의 미학이 오롯이 담겨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냅니다. 요루바 신화 속 신과 인물들, 그리고 그 지역의 춤과 의식은 몸의 형태를 반복하고 연결하면서 하나의 패턴처럼 펼쳐집니다.
작품에서 춤추는 몸의 곡선, 각도 그리고 기울기등 추상적인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자유롭게 공간을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이렇게 그려진 몸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지만, 아몬드 모양의 눈은 작품을 바라보는 이를 향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처리로 관람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펄 화이트, 빨간색, 노란색 그리고 블루 바이올렛으로 작업한 이 네 가지 작품들을 보면 사계절이 떠올랐습니다. 봄꽃 속에서 의식이 행해지거나 여름의 붉은 태양 아래 그리고 가을의 노란 은행나무, 마지막은 추운 겨울을 나타내는 블루 바이올렛 각각 계절마다 미세하게 다른 춤을 보여주면서 계절마다 다른 느낌의 전통의식을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Red Orbit Motion>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보다 더 정열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것처럼 보였어요. 역동성과 리듬감이 제대로 표현되어 아프리카의 전통성과 정체성이 매우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줍니다.
제가 소개할 마지막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Blue Violet Tower>입니다. 파란색 베이스에 바이올렛색이 조화롭게 섞여서 작품을 이루고 있죠. 인물은 나타나지 않고 아프리카의 바다를 연상하듯 하나의 물결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잎사귀나 꽃잎보다는 파도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그린 거 같았습니다. 대담한 색채의 이 회화작품도 중첩된 물감층의 추상적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은연중에 관람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툰지 아데니 존슨은 작업을 할 때 개인사적인 배경을 기반을 두고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 안에서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흑인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이거는 작품을 보고 느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긴 하지만, 드로잉을 한 후 강렬한 색채로 화면을 채운다는 점이 뭔가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한다고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작가님의 힘찬 붓터치 때문인지 아님 잘 배합된 색상 덕분인지 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툰지 아데니 존슨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작품 속에는 꽃잎과 잎사귀가 춤추고 있는 모습과 그 사이사이에 아프리카 부족민이 의식을 행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생기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강렬함이 아프리카 역사와 전통의 불멸성을 상징한다는 것을 느꼈고, 작가님 만의 특유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시 서문에 적혀있듯이 구상과 추상의 언어가 서로 대화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작품을 감상하면서 깨달아서 직접 와서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아프리카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Tunji Adeniyi-Jones, Courtesy of White C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