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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Dec 02. 2023

차별 없이 살기

마음 미니멀리즘


차별 없이 살기란 어렵다. 아무리 열린 사람이라도 차별은 피해 갈 수 없다.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 저마다의 이념, 사상, 경험, 가치관 등에 의해 만들어진 차별이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롭기란 어렵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깊게 뿌리박혀 있는 차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내가 일찍이 목격해 온 차별은 성차별이었다. 명절이면 어머니는 늘 몸살을 앓으셨다. 제사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큰어머니와 두 분이서 모두 도맡아 하셨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나도 손을 거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픈 게 싫어서.' 그렇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제사 준비를 한 사람은 절을 하지 않는 것, 한쪽에선 술 파티를 벌이고 한쪽에선 제사 음식을 하기 바쁜 것, 누군가는 밥을 먹고 있을 때 누군가는 주방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것, 그렇게 힘든 노동을 대물림으로 해결하려는 생각들까지. 그 속에서 나는 명절의 의미도 제사의 의미도 가족의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딸이 귀한 집안에서 나는 여태 공주로 자란 줄 알았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집안 어른들이 내가 태어난 걸 기뻐했던 건 일할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오랜 시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결국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둘째다. 첫째인 오빠가 있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편애를 느끼며 자랐다. 오빠와 나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달랐다. '내가 살갑고 다정한 딸이 아니어서 그렇겠지' 이해하려고 했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모든 자식을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는 거라 이해하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주말에 빨래를 해야 된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나 말고도 빨래할 사람이 있는데, 내 빨래도 아닌데, 왜 나한테만 이런 얘기를 하는지, 집안일은 왜 당연하게 내 몫이 된 건지, 엄마는 딸로 자란 설움을 왜 나한테 돌려주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응어리도 어쩌지 못했다. 내가 딸이라서 받은 차별이 있다면 딸이라서 받은 사랑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이런 상념들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린 날의 상처들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거라고'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애석한 것은 이 개인적인 이야기가 결코 한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진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나는 내가 받아온 차별보다는 내가 차별해 온 것들에 대한 반성과 차별 없이 살기 위한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과 싸울 시간에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성별, 인종,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술, 담배를 즐겨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어려울 것 같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자동반사적인 거부감은 감추기 어렵다. 비흡연자로서 흡연자에 대한 차별의식은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서 음주를 즐기는 사람에 호의적이긴 힘들다. 나서서 비난하지는 않지만 차별이라는 게 꼭 드러나는 차별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에 배척하는 마음이 들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런 마음속 차별이 또 무엇이 있을까?


차림새로 사람을 평가하는 내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길에서 누추한 행색을 하고 있는 사람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된다. 그 사람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시선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차별을 빚은 일은 또 무엇이 있을까?


후회되는 게 한 가지 있다. 큰아버지가 계셨다. 사고로 다리를 다친 큰아버지를 지칭할 때 어른들은 '아픈' 큰 아버지라 불렀고 나도 그렇게 따라 불렀다. 부르는 이름처럼 큰아버지와 거리감이 생겼다.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을까? 왜 굳이 아픈 사람을 콕 집어 말해야 했을까? 왜 아무도 그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걸 지적하지 않았을까? 아픈 사람이 아닌 큰아버지로 봐 드리지 못한 게, 못난 행동이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다.




누구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 누구든 차별받을 수 있다. 누구든 다치고 병들고 늙으며 다수가 아닌 소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차별과 혐오가 아닌 상호 존중과 배려가 앞서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부터 차별을 벗어던지려 노력하겠다. 사회적, 구조적 차별에 반대하고 개인적 차별의식을 과감히 버릴 것을 약속한다.


나는 성차별,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장애인, 어린이, 노인,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나아가 종차별주의에 반대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이성이 있고 동물은 이성이 없기에 열등하고 인간이 우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이 우월하기 때문에 동식물과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과 그에 따른 모든 착취구조에 반대한다. 이 땅에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들과 자연 생태계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차별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동등하고 공정하게 대우받길 원한다. 하지만 형평성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완전한 평등을 이루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사회적, 구조적 차별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제도적 마련에 대해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별 없는 사회'란 이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게 맞을지 모른다.


차별의 다른 말은 '모순' 같다. 내 안의 모순을 줄여나가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차별 없는 세상이란 존재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을 차별 없이 대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려는 노력이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차별에 동조하거나 당연시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가 다르면서도 결코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자연 속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서로 다름에서 오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그렇게 우리 사회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다정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은 '나'에 대한 차별이다. '나'는 여러 모습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아의 높낮이를 구별하려고 한다. 그 어떤 '나'도 차별하지 않는 것,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낮게 평가하지 않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나의 모습만을 추켜세우지 않을 때, 모두 나의 모습임을 인정할 때,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차별부터 멈출 때 타인과 세상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도 줄어들지 않을까? 다름을 다름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에 대한 이해다. '나'에 대한 이해 없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로 뻗어나갈 수 없다. 모든 균형은 '나'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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