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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Jan 16. 2024

종교 없이 살기


나는 종교가 없다. 종교를 가진 적이 없다. 무교인 집안에서 자랐다. 물론 교회나 절 근처에 가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간 적은 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신을 믿거나 신께 기도한 적은 없다.


엄마는 그때 잠시 교회에 볼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유치원생인 나를 교회에 데려간 건 일종의 체험학습이었으려나. 기억나는 건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며 먹으라고 주었던 포도 주스와 흰떡. 그때 먹은 떡과 주스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큼한 냄새처럼 이상하게 다가왔다.


중학교 때는 친한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따라갔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친구랑 논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친구는 강제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교회 사람들이 친구의 얼굴과 이름을 다 알고 있을 만큼 익숙한 공간에서 친구는 자유로워 보이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친구가 딱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군말하지 않고 일요일이 되면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동안 교회를 다녔다. 지옥 같은 시간을 함께해 주고 싶었다.


예배가 끝날 즈음 "기도합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입으로 중얼거리다 큰 소리로 울면서 온몸으로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예배실. 그곳에서 내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광경이 낯설고 기이하고 무서웠다. 매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듣고 믿는가? 홀로 다른 세상에 찾아온 이방인으로 교회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와 사람들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면서. 그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했다.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기도가 끝나면 다시 내가 알던 사람들의 얼굴로 돌아오는 걸 보면서. 편견이 없는 아이일 적부터 나는 줄곧 교회라는 장소에 거부감을 느껴 왔던 것 같다.


"거친 파도 날 향해 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지금도 떠오르는 구절이다. 청년부 활동으로 찬송가도 제법 열심히 불렀지만 내 목소리에는 믿음이 한 톨이라도 담기지 않았다. 길 잃은 어린 양처럼. 그럼에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주말을 친구에게 기꺼이 반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내심이 바닥났다. 교회에 가는 게 너무 귀찮은 날이었다. 몇 번의 거짓말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터라 더 이상 둘러댈 변명이 없었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더는 동행할 수 없음을 고했다. 나는 너와 함께 놀고 싶었던 것이지 교회를 가고 싶지는 않다고, 네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나 역시 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좋으련만, 내 배려를 알아 주지 않는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앞서 "시간 낭비 같다"며 날이 선 말이 나갔다. 그렇게 나는 교회를 벗어났고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가 지금도 교회에 다닐지 궁금하다.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아이는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을까. 어쩌면 방황을 끝내고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의 안녕을 바란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특별히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종교에는 회의적인 입장일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신실한 믿음에까지 회의적인 건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존중한다.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평소 불교 철학에도 관심이 많고, 스님과 신부님, 진실한 수행자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경외심이 들곤 한다. 진리는 하나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선조의 지혜로 내려온 종교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종교에 반감을 갖게 된 연유는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추악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터다. 신을 믿는다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 때문일 터다. 종교가 있어도 다르게 살지 않는 삶을 너무 많이 봐 온 터다. 그 믿음이 너무 가벼워 보인 탓이다. 믿음과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다. '나'와 '너'를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 짓는 것이 싫어서다. '나'의 믿음을 부정하는 타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잔인함에 질려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무자비한 학살에 분노해서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선을 위한 종교가, 다름 아닌 악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음을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보았음이라. 그래서 그 믿음이 모두 무용해 보였음이라.


누군가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그 마음의 초석인 믿음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가슴 깊이 믿을 구석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 것도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믿음 자체는 아무 죄가 없다. 믿음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훌륭한 마음이다. 부족하거나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타인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믿음을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다면 믿음만큼 강인한 마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래서 오랜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나약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여 그 이상을 따라가는 길. 그것이 더 쉬운 인생 길인지도 모른다. 교리라는 체계와 질서를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 또한 불안한 세상을 살기 위한 하나의 지혜인지 모른다. 옳고 그른 것도 정답도 오답도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믿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한낱 인간을 믿는다. 나약한 인간을, 사람을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는다. 사람과 사람의 연대의 힘을 믿는다. 선을 믿는다. 자연의 순리를 믿는다.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나누는 모든 것을 믿는다. 삶을 믿는다. 이 믿음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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