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앙―”
무궁화호가 경적을 울리며 출발을 알렸다. 기차가 청량리역을 빠져나와 춘천으로 향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하나둘씩 펼쳐졌다. 차 창밖 풍경이 그림책 넘기듯 한 페이지씩 넘어갔다. 키 작은 배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과수원을 지났다. 넓은 들판에는 흰색의 찢어진 옷을 입고 밀짚모자 쓴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 허수아비는 반갑다는 듯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들판을 벗어나자, 기차가 일렁이는 강물 위로, 아찔한 높이의 다리를 덜컹거리며 건넜다.
나는 깊어 보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갑자기 기차가 멈추면 어떡하지?’ 혹은 ‘기차가 저 차가운 강물로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무서운 상상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세일러문으로 변신해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약간 흥분하기도 했다. 상상과 흥분도 잠시, 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북한강의 윤슬을 보며 금방 차분해졌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작은 머리로 ‘어쩌면 저 강물은 따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차가 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를 날아오르는 물새들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평화롭다’라는 형용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흥미를 끌던 풍경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기차가 터널에 들어섰다. 경춘선의 터널은 길었다. 11살 꼬마의 집중력이 으레 그렇듯 창밖 검은 화면이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이 틈을 노려 엄마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엄마가 말했다.
“혼자 갈 수 있어? 화장실만 얼른 다녀와.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말고. 위험해.”
나는 엄마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그동안 기차를 여러 번 타봤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차 탐험! 나는 혼자서 다른 객실로 가볼 요량이었다. 나는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객실 안을 비틀비틀 걸어갈 때면 기차가 철로를 달릴 때 내는 쿵쿵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출입문에 도달하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드디어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무겁게 느껴지는 출입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출입문을 여는 순간 예상치 못한 강한 바람에 머리가 흩날려 정신이 없었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가 났고, 발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자갈길이 보였다. 출입문 밖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객실 간 연결공간을 보며 나는 ‘탐험을 다음 기회로 미룰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것은 무서움을 이겨내고 긴장을 풀기 위한 일종의 나만의 의식이었다.
나는 비장하게 출입문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덜커덩. 역시 예상대로 많이 흔들렸다. 나는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다리와 발가락 끝에 온 힘을 주고 걸었다. 등 뒤로 출입문이 쾅하고 닫히자, 나는 무사히 착지에 성공한 체조선수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아빠가 한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빠! 나 여기까지 혼자 왔어!”
내가 다가가자, 그 아저씨는 아빠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누구야?”
내가 물었다.
“물건 파는 아저씨야. 이거 아빠가 딸 주려고 저 아저씨한테 샀어.”
아빠는 대나무로 만든 길쭉한 수저를 보여주었다.
“집에 수저 많은데…… 이걸 왜 샀어? 엄마한테 혼나~”
아빠의 선물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투덜거렸다. 아빠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 아저씨가 강원도 사투리를 써서 친근했어. 아빠도 고향이 양구잖아. 우리 딸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빠 나이가 되면 같은 고향 사람 만났을 때 엄청 반가워. 그래서 샀어.”
아빠는 대나무 수저에 정신이 빼앗겨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온 내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나는 섭섭함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서 여기까지 왔는데 칭찬도 안 해주고…….”
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아빠는 칭찬 대신 위험하다며 얼른 자리로 돌아가라고 꾸짖었다. 하지만 이미 출입문을 훌륭하게 통과한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 모험심을 시험하고 탐험하고 싶었다. 아빠가 한눈판 사이 나는 건너편 기차 칸으로 과감히 돌진했다.
뭐든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던 나는 조금 전보다는 덜 긴장한 상태로 두 번째 출입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내가 있던 공간과는 다른 왁자지껄함과 열기가 느껴졌다. 그 객실은 MT 가는 대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있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언니 오빠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게임을 하기도 했다. 너무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나도 끼고 싶어 일부러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한 오빠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 혼자 왔니? 혹시 엄마 잃어버렸어?”
그곳에서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막상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당황스러웠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다음 객실로 꽁무니를 뺐다. 닫히는 출입문 뒤로 봄꽃 같은 생기가, 한여름 초록 잎의 젊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