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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말을 잘하고 싶었는가

1강. 말로 살고 싶었습니다

by 봄아범


메모부터 하고 시작할게요. 다.른.생.각.들.지.않.게.하.자. 다른.생각.들지.않게.하자. 다른 생각 들지 않게 하자. 누가 딴생각이 들면 안 될까요? 당신의 자기소개를 듣는 면접관이? 당신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구원해 줄 업무 발표가? 경쟁 PT로 사업권을 부여할 본사 담당자가? TF 팀원과 함께 공들여 만든 PPT를 검토하고 인사 평가를 하게 될 임원진이? 선배님은 할 수 있다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후배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아들이나 딸이? 절대 고집을 꺾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부모님이? 그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딴생각이 들지 않아야 할 사람은 상대방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나. 자신입니다. 말하는 동안 내가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대부분 말을 하면서 이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잘해야 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최종 합격을 들을 수 있게 하니까. 월급을 올릴 수 있으니까. 사업을 따낼 수 있으니까. 아이를 식탁에 앉힐 수 있으니까. 부모님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니까. 때문에, 저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습니다. 호흡은 불안정해지고, 말이 빨라졌습니다. 발음이 받침부터 조금씩 뭉개지기 시작하면서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라고 해야 할 말이 ‘큰 복수 부탁드립니다!’라고 외치는 민망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제 페이스에 제가 말려버리는 재난에 빠져버린 거죠. 말할 내용에 몰입하기 전에, 잘해야 한다는 딴생각이 제 입술의 핸들을 이리저리 꺾어버린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시는 걸 보니까, 당신도 그런 적이 있으신가 봅니다.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잡생각이 들지 않고 편안해야 듣는 이도 편안해집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원하는 말로 얻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겠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는 걸 검토하던 1990년대의 교실. 국어 시간만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전이면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정하자면 『틀리지 않고, 이어 읽기 대회』라고 해야 할까요. 방식은 이렇습니다.


1. 그날 배울 범위의 교과서를 그 날짜 번호인 학생이 읽기 시작합니다.
2. 만약에 읽다가 틀리면, 먼저 일어나서 읽는 학생이 이어 읽습니다.
3. 이어 읽는 학생이 틀리면, 또 먼저 일어나서 읽는 학생이 이어 읽습니다.
4.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제일 오래 읽은 학생은 작은 선물을 받습니다.


아마도 문해력을 높이고 싶은 선생님의 뜻이 들어가 있는 대회였겠죠. 원래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던 저는 그 시간에 진심이었습니다. 친구 Y가 틀리는 순간이 언제일지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해하고, 다른 친구 L이 먼저 일어나 읽으면 아쉬워하고, 저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숨기지 않았습니다. 제일 긴장하는 순간은 교과서를 읽는 때였습니다. 혹여 한 글자라도 잘못 읽을까 봐 신중하게 글자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범위 내의 부분을 모두 다 읽었을 때, 선생님은 저에게 담백한 칭찬을 건넸습니다. 이 말에 힘이 훅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현이는 책을 정말 잘 읽는구나.
아나운서를 하면 좋겠다.




아나운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매일 오후 9시나 8시에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 정확한 발음과 안정적인 모습으로 소식을 전하는 직업. 아나운서가 원고만 읽는 존재도 아닐뿐더러, 앵커도 뉴스 중간에 틀리지만, 1990년대의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의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는 칭찬이었습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저에게는 인정받는 말로 들렸습니다.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이 경직된 어깨를 스르르 풀리게 했습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기분. 그게 아나운서를 꿈꾸게 하고, 말을 잘하고 싶다는 의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학년마다 장래 희망 칸은 ‘아나운서’가 자리 잡았습니다. 힘을 완전히 빼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나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하는 말. 그게 저에게는 칭찬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신 것. 정말 잘하셨습니다. 제 칭찬을 들으니까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미소 짓고 있는 당신을 상상합니다. 상대방의 인정하는 말로 좋은 느낌을 가진 첫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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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꿨던 소년. 2012년부터 종교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진행, 제작하는 남자. 2023년부터 가족과의 기록을 남기는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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