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만나자
우리 삼총사는 2학년이 되면서 각자 학과에 적응해 나갔다. 현덕이와 나는 기숙사를 나와 함께 원룸을 빌려 자취를 하게 되었고 미영이는 휴학을 했다. 미영이는 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한데다 나 못지 않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고 선교사로 진로를 결정한 뒤 휴학을 반복하다 한참 뒤에야 졸업했다. 2학기가 되어 나 역시 아빠가 아프셔서 휴학을 하게 되었다. 아빠를 돌보겠다는 이유였지만 얼마되지 않아 아빠는 돌아가셨고 나는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삼총사외에는 연락하고 싶지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를 감싸고 있다 생각되던 때였다. 겨우 용기내어 정읍을 떠나왔던 나에게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 ‘역시 나 때문인건가’라는 근거없는 자책들로 지냈다.
아빠의 장례식에 현덕이가 찾아와 나를 안아주었다.참고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어본 적 없는 나였다. 그저 참아내어야 하는 것이었던, 드러내어 아파하기엔 죄스럽기만 했던 나의 아픔을 가만히 안아주던 현덕이의 품이 따뜻했다. 그리고 성의껏 조의금을 넣던 스물한살의 의젓하고 가난한 미영이의 위로가 소중하면서도 마음아팠다.
현덕이와 미영이를 향한 고마움과 아끼는 마음은 늘 내마음 속에 있었고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우린 언제나 같은 마음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랬던 우리들은 졸업 후 각자의 곳에 살며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현덕이는 서울 중소 의류업체 막내로 들어가 88만원 최저시급을 받으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어쩌다보니 정읍을 떠나 전주도 아닌 저어기 완도 노화도에서 99만원을 받으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영이는 그마저도 없는 무보수 선교사가 되었다. 결혼을 하면서 목포에 터를 잡은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며 정신없는 독박육아에 접어들었고 그러는 사이 어느날부턴가 현덕이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미영이야 늘 해외에 선교를 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현덕이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드센 아줌마가 되어 가던 나에게 실망했던 것일까. 전화도 해보고 손이 기억하던 집전화도, 늘 주고받던 메일도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몇년 후 현덕이 어머니에게 현덕이가 결혼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헤어지게 했을까. 우린 그럴 사이가 아닌데.. 나만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무심했던 것일까.
나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6시간을 버스타고 해남 땅끝에 도착한 후 또 배를 타고 노화도까지 찾아와 준 현덕이와 보길도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자전거를 빌려 보길도를 누비다 바닷가에 누워 안개낀 바다를 바라보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의 바다는 너무나도 선명한 푸르름이었고 아늑하였다. 그런 바다는 처음느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두고 우린 왜 이렇게 되버렸을까.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된 요즘 부쩍 삼총사가 떠오른다. 그나마미영이는 결혼 후 해외 선교를 잠시 접고 익산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가끔 연락도 주고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얼마 전 눈내리던 겨울 홀로 기차를 타고 익산에 찾아가 미영이를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다. 도도한 걸음과 나를 놀려먹는 말투는 여전하지만 미영이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정신없이 살아오면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다. 내가 가장 쓸쓸하고 아팠던 시절 나를 아껴준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직 현덕이의 연락을 기다린다. 나이가 들면 꼭 연락할 거라고. 다시 우리 삼총사가 모일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내 백팩에 손을 얹은 미영이와 느린 말투로 툴툴대는 나를 옆에서 보며 깔깔대고 웃는 현덕이의 모습이 그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