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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Aug 19. 2015

그리스를 그리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환대와 관대함의 문화.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단연 핫 이슈였던 여름이 지나간다.

그렉시트냐 아니냐, 국가파산이냐를 두고 언론을 한동안 뜨겁게 달구더니 국민투표 이후 삼차협상에서 새로운 긴축정책을 수용하고 여전히 빚의 탕감에 대해 논의되는 가운데, 진짜로 그리스가 망하지 않아서인지 어느덧 그 뜨거웠던 언론은 다른 이슈로 무게를 옮겨간 것 같다. 여전히 사람들의 선입견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그리스를 너덜너덜한 이미지로 만들어 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가진 그리스의 문화적 힘은 이런 위기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우연히 읽게 된 킨포크의 기사 중 한 부분이다.


"환대란 이방인을 환영하는 것을,
관대함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손 내미는 행위를 말한다.

환대와 관대함은 공동체를 만들고,
공고히 하며, 닥쳐온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고립감과 두려움이 팽배하는 문화에서는
환대와 관대한 정신이 자라날 수 없다."

-사회, 소속의 구조/ Peter Block-


환대와 관대한 정신에 대해서라면 그리스 문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문화 전반에 걸쳐있는 기본 중의 기본은 이방인을 환대하며 수많은 상황을 대하는 관대함이다.
여행을 가서 숙소 주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지역에 여행 온 외국인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강렬한 진심이 보이는 곳도 그리스이고, 굳이 귀찮게 나서지 않아도 될 사소한 도움도 기꺼이 주는 곳이 그리스이다.

물론 그리스에 있는 동안 일부 외국인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나이 드신 분들이나 동양인을 놀려대는  어린아이들을 종종 만나 상처도 받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이들로 상처받을 때면 나타나는 따뜻한 사람들이 그 서러움을 극복할 치료제가 되곤 하는 곳이 그리스였다. 그렇게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서러운 날이면 하늘에서는 반드시 그리스인 천사하나를 보내주곤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패트릭 리 퍼머의 "마니 여행기"에도 언급되는 그리스의 환대문화, '필로크세니아'는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코드 중 하나이다. 그리스어로 '필로스'는 친구를 뜻하고, '크세노스'는 외국인, 이방인을 뜻하는데 두 단어가 합쳐져 '이방인을 친구처럼 대함'이라는 뜻을 품은 명사 필로크세니아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인은 태고의 위대한 어머니가 세상을 지배하던 아득한 시대부터 항상 다신교도였다. 다신교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고장을 찾아 온 존재면 누구든 환영한다는 것이다. p.294

#아주 무신경한 나그네가 아닌 이상 누구든 그들의 표정-가끔은 경솔하고 투박하게 들리는 몇몇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에 담긴 열의와 배려를 보면 곧 이 질문이 진심으로 열렬한 관심에서, 가능한 한 즉시 공통점을 찾아서 위험하고 쓸쓸한 마니의 환경으로부터 나그네를 보호해 주려는 소망에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무관심은 짐승 같은 것이며 인간적 감정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p.336


헨리밀러의 그리스기행문 '마루시의 거상' 곳곳에서도 그리스인들의 필로크세니아적 분위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꽃처럼 마음을 열어준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리스가 작은 나라라서 그렇다고, 그들이 방문객들을 불러들이는데 열성을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 외에도 작은 나라를 몇 군데 가 보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정반대였다. p.73,74


#나는 또한 평생 처음으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시 말해서, 개방적이고 솔직하고 자연스럽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뜻이다. p.287


#그리스가 내게 남긴 인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그곳이 인간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스는 신들의 고향이다. 신들이 이미 죽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존재감은 여전히 느껴진다.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 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p320,321


#그들은 속이 찰랑찰랑 차 있는 상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내면도 흘러넘칠 정도로 채워준다. 그들은 차고 넘치는 삶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는 편을 가르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p.325
필로크세니아라는 단어와 함께 비슷한 의미의 단어 필로티모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단어를 그대로 풀면, '귀히 여기는 것/행위를 사랑하다/좋아하다.'가 되는데, 외부인이든 자국민이든 사람에 대한 경의와 예의인 환대와 관대함, 배려와 보살핌의 뜻을 담은 깊은 단어이다.



 환대와 관대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리스인들. 그들에게 이 두 가지는 배우는 것이 아닌 태생적으로 내면에 흐르는 가치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필로티모는 우리 그리스인들에게는 호흡과 같다.
그리스인은 필로티모 없이 그리스인일 수 없다.                                           



지금 그리스는 경제위기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렵지 않게 그리스는 망한나라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들이 반드시 이 어려움을 통과할 것이라 믿는다. 환대와 관대한 정신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잘 가꾸어져  '상식'이 되어있는 사회는 하나가 되어 극복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제금융, 긴축정책, 캐피탈 컨트롤...한국이 메르스를 겪고 있는 동안 외신들의 뉴스에선 모두가 다 감염될 것 같은 호들갑을 떨어 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뉴스의 이면의 실제보다는 자극적이고 공포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경제위기가 시작되고 긴축재정을 겪는 동안 그리스에 살면서 수많은 자영업자가 가게 문을 닫고, 월세를 내지 못해 야반도주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내라는 고지서를 받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식료품을 모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문화생활을 제공했으며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기본 식량인 빵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캐피탈컨트롤이 시작되고 국민 선거를 결정하면서 가장 놀랐던 뉴스는 그 무엇도 아닌 은행업무가 마비된 동안 무료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하겠다는 발 빠른 발표였다. 정신없이 어려움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질책을 받을 일도 아닌데, 그들은 망설임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내용들이 한국에는 전혀 소개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사회 각 기업과 재단에서 힘든 시기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이익보다는 베풂을 선택하는 모습들을 보며 이 생각은 더욱 더  확고해진다. 풍요롭고 호화롭진 않아도 나누는 법을 알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이 상식인 문화는 위에서 언급한 피터 블록의 글처럼


공동체를 만들고, 공고히 하며, 닥쳐온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힘이 될 것이다.


그리스는 여전히 필로크세니아와 필로티모의 정신이 지배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땅이다. 비록 자본주의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내세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가치를 소중히 하는 기본적 상식이 갖춰진 사회의 힘은 소리 없이 강하다.


"그리스인들은 넝마를 견뎌내는 힘을 안다. 내가 가 본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넝마 때문에 격이 완전히 떨어지는 일은 없다. "-헨리 밀러 '마루시의 거상'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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