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랑 홍대거리
들국화 40주년 공연을 보러 갔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이 표를 사준 덕분에 십 년 전에 가왕 조용필 공연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아들 덕분에 남편이랑 셋이 같이 갔다.
연세대 독수리동상과 학생회관 입구에 민주화 운동을 위해 애쓰다 먼저 간 친구들 조각이 눈길을 끈다.
들국화 하면 전인권을 떠올린다. 1985년에 나온
들국화 1집 앨범은 100대 명반 1위로 선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음반은 포크·록·발라드가 어우러진 사운드로 세대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록의 대중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록은 마니아층의 음악으로 여겨졌지만, 들국화는 록을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록 음악하면 당시에는 무조건 외국을 떠올렸는데 들국화 이후 한국에 한국적인 록음악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 시대적 배경과 의미로는 전두환 군부정권시절 청춘·자유·저항의 아이콘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며 이후 한국 록·인디 음악에서 청춘의 소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니 80년대 이십 대였던 나 또한 특별히 들국화의 팬이 아니었어도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흥얼거리던 한 사람이었다. 들국화 노래 중 <그것만이 내 세상>, <사노라면>은 다들 친숙하다.
들국화의 노래는 많이 리메이크되고 커버되었기에 사실 리더 전인권이 ‘마약사건'으로 그룹활동이 중단되고 멤버 간 불화로 해체될 때도 계속 불려졌다.
〈걱정 말아요 그대〉와 〈매일 그대와〉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 OST로 리메이크되며 다시 국민가요가 되었다.
특히 달달하고 감성적인 들국화 멤버 최성원이 작사작곡한 〈매일 그대와〉는 누구나 좋아한다.
2013년 최성원과 전인권 사이를 늘 조율하던 드러머 주찬권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별세했다. 아들은 그 후 최와 전 두 사람사이가 더 멀어졌고 지금 최성원은 제주도에 있으면서 같이 활동하지 않는 게 아쉽다고 했다.
최성원은 들국화의 브레인이었고 전인권은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가창력을 가졌기에 두 사람이 계속 함께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암튼 전인권은 이제 71세다. 나이는 자연스러운 흐름과 변화라고는 하지만 그의 59세 때 공연을 본 아들말로는 그때는 벽을 뚫고도 나오던 그 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50대와 다른 그의 70대의 나이를 생각하며 나는 지는 해 노을의 장엄함은 일출을 능가한다는 심경으로 그의 40주년 콘서트를 보았다.
앙코르곡에 이은 그의 마지막 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이전에는 앨범 마지막 곡으로 건전가요를 넣어야만 했었는데 그래도 공연의 마지막 곡이 '통일'이란 게 개인적으로는 우리 세대에 통일을 염원하기에 더 와 닿았다.
1953년생 전후세대인 그는 가난과 독재와 검열과 그의 곡 대부분이 금지곡이었던 시절을 건너왔다. 장발과 독창적인 창법으로 그자신도 방송출연도 거부했었지만 들국화의 노래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뿌리를 내리고 청춘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힘을 주었다. 그의 곡 <행진>은 윤도현 밴드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서태지, 아이유 등도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 커버했으니 40년 그의 음악활동은 리스펙 할 만하다 여겨진다.
이름이 많은 걸 시사하는데 처음 그들이 밴드이름으로 코스모스, 들장미란 꽃을 떠올렸다는데 ㅎㅎ
들국화로 작명한 건 그들 노래와 이미지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도 대부분 5~60 대가절반 이상이었다. 옆자리 아줌마 두 분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며 들국화 골수팬인가 싶었다. 누군가와 같은 시대를 살며 시대적 감성,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아들은 30대지만 서태지와 들국화 등을 좋아하니 조숙한 편이고 우리나라에서 적어도 50~70대는 신중현 김창완 김광석 김현식등과 함께 들국화를 기억할 것이다.
공연장소인 연세대 강당이랑 홍대거리가 가까우니 남편은 오랜만에 그곳 분위기도 보러 가자고 했다.
~홍대 메인거리에 고깃집과 왼편 건물 이층 미용실 홍보도 재밌다. 이태리 장인이 구운 나폴리 화덕 피자는 맛있었다.
나는 여행 가기 전 둘째 아들과 며느리도 볼 겸 홍대 거리 이태리 화덕피자집에 점심약속을 했다. 홍대거리는 십 대 이십 대와 외국인들로 힙한 곳이다. 길거리 패션도 구경하고 공연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아들 며느리에게 여행 가서 쓰라고 두둑한 용돈도 부부가 따로 받았다.
나는 특별한 정성으로 아이를 키우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커 준 것 같은 아들에게 봉투를 받으니 더욱 고마웠다.
삼사십 대 아이 낳아 남들 하는 만큼 아이 키우는 고생이라면 젊어서 고생은 할 만하다 본다.
특히 자식농사는 가장 할 만한 일이니 들국화 노래 제목처럼 <제발> 대한민국에서
아이 좀 많이 낳아서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