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한 달 여행 종착지 투르
나는 인생에서 여행은 영혼의 숨통을 트여주고
내가 걸어간 공간의 길이와 넓이 만큼
내 의식도 확장된다 생각하는 노마드일지도 모른다.
한 달간의 프랑스 여행이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파리 6일, 브장송 4일, 디종 7일, 툴루즈와 보르도, 라로셸, 앙제에서 10일을 보내고 이제 3~4일 만이 남았다. 파리 인-아웃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던 터라, 파리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가기 위해 남은 일정은 투르(Tours)에서 보내기로 했다. 루아르 강변을 따라 성을 둘러보는 여정의 연장선에서 또 다른 성을 볼 수 있고, 파리 공항도 바로 갈 수 있어 최적의 선택이었다. 여행의 마무리는 차분히 보내자는 마음으로 역 근처 숙소를 예약해서 새벽 공항행을 준비했다.
앙제 호스트 미레이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로 투르에 도착했다. 친절한 역무원과 사진도 남기고, 다음날 탐방할 코스도 미리 확인해 두었다. 캐리어를 끌고 역에서 가까운 숙소로 이동했는데, 근처에 음식점이 많아 식사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투르는 루아르 계곡의 중심 도시로, 인구 13만 명이지만 도시권 전체는 약 50만 명에 달한다. 파리와도 가깝고 접근성이 좋아 문학 작품에도 자주 등장했다. 유학생 시절 나는 지인의 어학코스 등록을 도우러 잠시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투르는 '표준 프랑스어'의 본고장이자 학생 도시고, 루아르 고성 투어의 베이스캠프인 데다 조용해서 또 다른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숙소에 짐을 풀고 AI에게 반나절 코스를 물어보았다. 투르 시내는 도보 3~4km로 모든 명소가 연결되어 있어 걷기에 최적이다. 보통 구글 지도에 의지해 길을 찾는다. 그런데 길치인 남편은 끝까지 지도를 의지하는 편이지만 나는 몇 번 돌다 보면 금세 도시 윤곽을 파악하는 편이다.
AI가 추천한 투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Gatien)으로 가는 길에 일요일에도 문을 연 빵집이 있어 샌드위치를 샀다. 남편은 "이제 바게트 샌드위치 먹을 날이 며칠 안 남았다"라며 아쉬워했다. 빗방울이 조금 떨어져 발걸음을 재촉했고,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프랑수아 시카르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작은 연못이 있는데 바로 앞에 발자크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 첫날 방문했던 발자크의 생가가 떠올랐다. 19세기에 조성된 이 광장은 조경과 역사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유리 발자크 동상은 2000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광장과 연결된 길 건너편에 대주교 정원(Jardin de l'Archevêché)이 있다. 입구에는 레바논 삼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 31m, 너비 33m, 수령 220년(1804년 식재)의 거대한 나무는 성경 속에서도 언급된 레바논 백향목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줬다. "주목할 만한 나무"라며 보호 가치를 설명한 문구가 쓰여있었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연결된 미술관에 들어갔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미술관은 여느 유럽 미술관과 비슷했지만, 마지막 여행지라는 마음에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대성당 앞에서는 건물의 크기에 다시 압도되었다. 13~16세기에 건축된 생 가티앵 대성당은 고딕부터 르네상스까지 건축사를 보여주는 걸작이었다. 길이 100m, 탑 높이 68~69m의 규모에 스테인드글라스도 눈부셨다. 실내를 둘러보고 나와 포장마차에서 커피를 마셨다. 비가 흩뿌리는 광장에서는 투르 역사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1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사진과 기록이 실외에 전시되어 도시의 숨결을 생생히 전달했다.
스스로 정의하는 투르 사람들이라 적힌 글 아래 “한때 수도사들의 도시였던 투르는 오늘날 학생들의 도시가 되었지만, 마치 속도를 늦추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마지막으로 루아르강 변의 윌슨 다리(Pont Wilson)를 찾았다. 평범한 다리였지만 강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원하게 쫙 뻗은 전철을 따라 역까지 걸어오며 피로를 잊었다. 뚜벅이 여행이 주는 여유로움을 만끽한 순간이었다.
앙보아즈 성 투어
이튿날 아침, 앙부아즈 성(Château d’Amboise)을 향해 일찍 역으로 나섰다. 루아르 계곡의 보석 같은 이 성은 기차로 20분 거리라 반나절 여행에 딱이었다. 시간이 남아 투르역의 아름다운 파사드를 사진에 담았다. 그런데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다. 기차표인 줄 알고 역 안 자동판매기에서 산 것이 버스표였다! 역무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기차표로 다시 바꾸었고, 남은 시간에 투르 시청을 보러 갔다.
투르 시청은 아름다운 르네상스· 벨에포크식 건물로 정말 프랑스 다웠다. 마침 시청 안에는 나이별로 아동부터 청소년까지 추천할만한 책을 부스별로 따로 만들어 특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었는데 발자크와 데카르트 등 이 도시 출신의 인물사진으로 장식한 전시홀 벽면이었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성 투어를 가는 기차를 탔고, 모든 역에는 당연히 화장실이 있다는 생각으로 기차 안에서 화장실을 안 간 것을 후회하며 화장실도 없는 인구 1만 명이 사는 앙부아즈역에 내렸다. 바람이 부는 길을 따라 성을 향해 걸어갔다. 바람은 갈수록 강해져서 나중에는 성을 바라보며 걷는 다리 위에서 엄청나게 불었다.
성안으로 들어가 투어를 시작할 즈음에는 비도 같이 흩뿌려 비바람 부는 성 위에서 루아르강과 도시를 내려다보는 기억에 남을 시간을 가졌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나선형 계단으로 연결된 왕과 왕비의 침실과 거실, 회의실 등이 고딕 & 르네상스 양식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지금 우리는 공간 크기는 달라도 이전 왕 못지않은 편의시설과 안락함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벽난로가 있긴 하나 지금의 보일러 시설만 하랴! 촛불을 아무리 켠들 지금의 전등만 하겠냐 말이다.
성은 15세기말 루이 11세와 프랑수아 1세 시대에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루아르 계곡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양식 성으로 프랑스 왕가의 정치 중심지였다. 그런저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을 하며 성 정원 투어까지 마치고 근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성으로 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프랑수아 1세 국왕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로 건너왔다.
이탈리아 건축양식을 좋아하고 르네상스 문화를 동경했던 프랑수아 1세는 1516년에 당시 최고의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해 말년을 클로 뤼세 성(Château du Clos Lucé)에 살도록 했다. 이 성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3년을 보내고 1519년 생을 마감했다. 성 내부와 넓은 정원에는 그가 구상했던 발명품(글라이더, 탱크, 투석기 등)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다방면적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의 완벽한 이상적인 비율을 잘 나타낸 유명한 그림이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인간을 상징하는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우화적으로 상징했다.
그러나 그 성 역시 크긴 하나 지금의 아파트 문화에 비하면 썰렁하고 부엌과 거실도 불편한 구조였다. 하지만 부러운 것은 엄청 넓은 정원이었다. 자연 속에서 묵상하고 작품을 구상했을 화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가 상상되었고, 특히 여러 가지 화구와 도구가 전시된 대가의 서재를 본 것은 내게 무척 의미 있었다.
나는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이 성의 화장실일 것 같다. 며칠 만에 볼일을 보는 데다 배가 살살 아파서 세 군데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보니 결국 이 성의 화장실은 다 섭렵한 기분이 들었다. 파리의 발자크 생가에서도 그의 서재에 딸린 화장실을 가면서 남다른 기념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투르의 명소를 두루 돌아보고 우리는 이튿날 새벽같이 기차를 타고 샤를 드골 공항을 가야 했기에 일찍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남편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마지막 비행기 좌석 체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이제 짐 싸기 달인이 된 거처럼 후다닥 짐을 챙겨놓고 잠을 청했다.
집으로 향한 길
투르에서 파리 몽파르나스 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마지막 복병을 만날 줄이야! 남편과 나는 원래 역에서 공항까지는 무조건 택시를 타자고 계획했다. 요금이 좀 나와도 우리 둘 다 짐을 생각하면 그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을 재어보던 남편이 지하철로 이동해서 RER로 갈아타고 공항터미널까지 가도 시간이 넉넉하다고 하기에 나도 그러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파리 지하철의 수많은 계단과 고장 난 엘리베이터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 짐을 계단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이 몇 번이나 도와주며 올려주었다. 민망함도 있었지만, 그들의 미소에 고마움이 더 컸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건네던 작은 도움은 나에게 여행의 또 다른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여행은 풍경보다
사람의 온기를 남긴다.
길고 짧음을 떠나,
모든 여정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과
마음의 기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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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에 남아있는 음식사진도 모아서 방출해본 ^^%
이 기사는 오 마이 뉴스에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