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민주주의를 둘러싼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다. 이러한 유형의 논쟁 가운데 가장 최근의 사례는 다수당이 의석수로 밀어붙여 법안을 통과하려는 정치적 태도, 곧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입법독주”와 관련이 있다. 올해 민주당이 편법으로 안건조정위원회를 무력화하려 시도하고 실제로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일은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1) 주요 언론사의 평론가들은 이처럼 다수당이 의회에서 의석수로 상징되는 힘의 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른 정당의 의견을 무시한 채 법안 통과를 강행하는 것이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비판의 화살이 다수결을 표적으로 삼으면서도,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참된 다수결이란 그 안에 숙의(deliberation)를 전제한다고 역설한다는 사실이다. 이 주장은 타당한 설명으로 보이며 각계각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의회에서 지배적 다수가 그들의 의사를 관철하는 것은 심의 절차의 중요성을 감안하더라도 민주주의의 본질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원래 종국적으로 다수결일 수밖에 없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목적이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이다.
ㅤ민주주의의 가치와 목표가 무엇인지는 수많은 정치적ㆍ헌법적 논쟁의 저변에 놓인 심층적인 주제다. 우리 헌법의 내용 중 권리장전에 해당하는 제12조 제3항이 검찰 수사권 보장의 근거로 해석됨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현재 입법 절차적 측면에서 부각된 쟁점은 민주주의 과정에서 합리적 심의에 초점을 둘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의사에 주목할 것인지에 있다. 물론 양자는 서로를 경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이들 관점 사이의 대립이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무게 추가 어디로 기울어야 하는가를 다루는 상대적인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다수의 의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소수가 심의 절차에서 배제되더라도 마지막에는 모두가 동등한 의결권 ― 찬성이든 반대든 똑같은 가치의 한 표 ― 을 갖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심의의 불충분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결정이 다수의 선호와 일치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민주적 가치의 손상이라고 여길 것이다.
ㅤ나는 우리 역사 속에서 다수당이 독단으로 비추어지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논거를 바로 이 민주주의관에서 찾았을 것이라 본다. 그것 외에는 반민주적 폭거라는 비판에 대해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지성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마땅한 근거를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로 최근 사례에서, 검수완박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다수당인 민주당의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주권자와의 약속을 지켜 반드시 검찰개혁을 완수할 것”이라고 말했는데,*2) 이 발언은 압도적인 과반의 의석수를 가져다준 지난 총선에서의 승리가 그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라는 생각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다수를 겨냥한 비판의 내용은 충분한 심의의 이점을 강조하거나 숙의를 통해 최선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ㅤ대한민국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머릿수를 세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믿는 사람한테는 이 조항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 왜 헌법은 주권이 다수가 아닌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하는가? 혹시 헌법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헌법 제1조에는 어떠한 속임수도 없다. 성실하게 민주주의를 좇은 정치공동체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곳에서 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인민(people)의 이름으로, 혹은 인민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 요구된다. 학자마다 민주주의를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지만,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한 가지 일관된 서술은 민주주의란 본래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민에 의한 지배(rule by the people)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민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개인(individual)과는 다른 개념이다.
ㅤ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 따르면 정치 공동체 구성원은 집합적으로 인민이라는 이름을 가진다고 한다.*3) 여기서 인민은 공동적 관념으로 이해된다. 가령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가결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해당 국민투표에 참여한 영국인 다수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통계적 의미에서 정확할지 몰라도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점에 부합하는 설명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면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은 인민 그 자체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보다 정확한 서술은 영국 인민이 그들 스스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했다는 것이 된다. 민주주의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제에 대해 반대했더라도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찬성으로 결론이 나면 그 결론은 찬성하는 이들만의 결정이 아니라 반대하는 이들을 포함한 전체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
ㅤ혹자는 전술한 내용을 읽고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를 떠올렸을 수 있다. 그리고 연달아 포퍼(Karl Popper)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아마 위와 같은 설명이 마치 전체주의를 조장하는 위험한 이야기처럼 들렸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자유의 적절한 개념관에 근거했다고 볼 수 없다. 총통이 취임하거나 수권법이 제정된 순간 자치는 끝장났기 때문에 그러한 체제를 민주주의라 일컫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명백히 구별된다. 양자를 가르는 경계선 가운데 하나는 인민이 자기 지배를 실현하는 자율적 주체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타율적 객체인가 하는 점이다. 특수한 정치적 목적이 강요되는 곳에서 인민은 자유롭지 않다. 물론 신자유주의를 고수하는 이들은 의회에서 전 국민의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민주주의도 전체주의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해당 공동체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관하여 결정할 권리를 가지되, 오직 자신의 선택에 한정해서 개별적으로만 이익을 얻거나 부담을 져야 한다면 집단적 자치는 그 자체로 난센스가 된다.*4)
ㅤ다수의 횡포로 훼손된 민주주의적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수가 일삼는 전횡을 저지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당장 악화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뭉뚱그려 “민주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하거나 “합의의 정신” 또는 “민주주의의 정신”이 실종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모호하다. 우리가 손상된 민주주의적 가치를 구체화한다면 소수가 다수의 횡포에 의해 심의에 참여할 기회를 부당하게 제한받았을 때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도덕적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유형의 주장을 한층 더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민주적 가치로 정치적 영역에서의 평등을 고려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우선 그 가치란 자유라고 제안하고 싶다.*5) 이때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배의 실현을 의미한다. 곧, 내가 지시하는 유형의 자유는 콩스탕(Benjamin Constant)이 고대인의 자유와 구별하여 근대인의 자유라 불렀고, 벌린(Isaiah Berlin)이 소극적 자유와 구별하여 적극적 자유라 일컬었던 것이다.
ㅤ민주주의를 자유와 연관 지어 설명할 때 민주주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전제군주나 총통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기 지배는 민주적 자치의 가장 강력한 이상이다. 민주주의를 핵심적인 통치 원리로 채택한 정치 공동체라면 대의제를 시행하더라도 최종적으로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은 공직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지배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다음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명령을 내린다면, 설령 대다수 국민이 기본소득에 찬성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으로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는 사태를 통제하는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ㅤ민주주의가 자치를 보장해 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다수결도 그런가? 다수결은 전적으로 자치를 보장해주는가? 좀 더 세부적으로, 어떤 정치 공동체가 다수결로 운영된다는 사실은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자치를 보장받고 있다고 말하기 위한 조건인가? 나는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지배이며,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은 인민 그 자체에 의해 내려진다는 점을 언급했다. 최후에 다수결로 결정하더라도 그 의사결정은 개개인의 의사를 아우르는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결정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회의장에서 특정 당파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을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만장일치로 의결한다면, 그 의사결정은 구성원 모두의 결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동등하게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인민이 공동적 관념에 기초한다고 전제했다. 만일 민주주의가 정치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적과 동지의 적대적 투쟁에서 승리한 다수에 의한 지배라면, 민주주의는 패배한 소수의 자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ㅤ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에 충실할 때 인민의 의사는 구성원 다수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인민 그 자체가 내린 결정으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반대한 이들도 그 결정에 책임이 있다. 이는 집단적 책임의 사례를 제시할 때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인들은 찬성에 투표했든 반대에 투표했든 브렉시트로 발생하는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이제 이처럼 집단적 책임을 ― 그 결정에 반대한 이들까지 포함된 ― 정치공동체 구성원과 결부하기 위한 조건을 기술할 차례다. 그 조건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이 집단적 자치에 기여하는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으로서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집단으로부터 윤리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가질 기회 내지는 자격 ― 자기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고, 타인을 설득할 기회나 자격 ― 을 박탈당한다면 더는 책임 있는 행위자의 지위에 있지 않게 된다.*6)
ㅤ우리는 다수의 횡포가 자유를 훼손한다는 논변을 살피고 있다. 사람들은 경솔함을 방지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민주주의 절차에서 다수결 외에 심의를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이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이나, 일반 상식을 전제로 한 문제에 관해 토론할 때는 설득력을 잃는다. 가령 인종차별은 부정의하고 잘못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에 기초하여 인종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할 때 우리는 특정 인종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발언권을 줄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 주장은 문명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미 몇 세기에 걸쳐 충분히 논박되어 더는 토론할 거리도 안 된다.*7) 우리는 “모든 사람은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한다”라는 조문 한 개를 법률에 추가하는 데 절대다수가 동의하는데도 몇몇 백인우월주의자의 허황된 궤변을 듣는 일에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며, 오히려 숙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ㅤ그렇다면 심의 절차는 왜 필요한가? 토론이나 논쟁 없이 박수갈채만으로도 충분히 상식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도 왜 우리는 먼 길로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가? 앞서 나는 집단적 결정이 자기 지배로 수긍되기 위한 조건을 언급했다. 이 견지에 따르면 민주주의에서 심의가 요구되는 타당한 이유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경솔함을 방지한다거나 중지(衆智)에 근거한 결론이 갖는 약간의 진리성을 옹호하는 논리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치공동체 구성원이 집단적 행동의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로서 지위를 가지고 집단적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을 확립하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8) 사람들은 표결뿐만 아니라 심의에 관해서도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심의권을 침해하는 것은 반대자를 포함한 우리 인민의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훼손한다. 그것은 표결권을 침해하는 것만큼이나 부당하다.
ㅤ지금까지 우리는 민주주의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민의 자기 지배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수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전술한 이야기는 너무 당연한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토의를 생략하거나 특정 견해를 가진 사람의 입을 틀어막거나 다양한 주장들 사이의 경쟁을 금지하거나 그밖에 다른 필요한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관철된 결정이 비민주적이며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정당성이 없는 결정을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불법이며 폭압이라고 여긴다. 민주적인 정치공동체에서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이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정당성의 문제로부터 유리된 채 이해할 수 없다.
ㅤ다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다수결이 무의미하다거나 심의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수결은 유용하고 적절한 의사결정 방법이다. 그러나 다수결 절차가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지라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를테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투표권을 가진 곳에서 다수결은 이교도나 무신론자의 자치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조건에는 성년에 이른 사람이 종교적 신념 내지는 세계관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 동등하게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다수결은 그 자체가 스스로 민주적 절차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보장하는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민주적 절차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Oct 28, 2022
* 대표이미지 출처: 대한민국국회
* 이 글은 또한 나의 개인 블로그에 게시되었다. (최초발행: Oct 28, 2022)
1) 강경석, “민주, 탈당 민형배로 안건조정위 무력화… 8분만에 법사위 표결,” 동아일보 (2022년 4월 27일), A3면
2) 김기용, “박홍근 "검수완박법 오늘 반드시 처리"…의장 "여러가지 고려",” 노컷뉴스 (2022년 4월 27일)
3)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팽귄북스, 2016), p.26
4) 예컨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에 찬성한 사람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거나 이에 반대한 사람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면 집단적 자치는 실현될 수 없다.
5) Ronald Dworkin. Freedom’s Law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21
6) Ronald Dworkin, “Equality, Democracy, and Constitution: We the People in Court,” Albera Law Review (vol.28, no.2, 1990), p.340ff
7) See Jeremy Waldron, “Hate Speech and Political Legitimacy,” in Micheal Herz & Peter Monlar(eds.), The Content and Context of Hate Speech: Rethinking Regulation and Respons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p.329-340
8) Ronald Dworkin, “A New Map of Censorship,” Index on Censorship (vol.23, no.1-2, 1994), p.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