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긍정적인 인간으로 보이는 이유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반에서 영어를 꽤나 잘하는 아이로 뽑혀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엄마도 가야 해?"
"아니, 안 가도 돼."
그렇게 유난히 체구도 작은 10살의 나는 홀로 걸어 대회장으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왔지만, 내가 더 잘할 거야. 내가 다 이길 거야.'
그리고 실제로 다 이겼다.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장을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 나 최우수상 받았어!"
"응, 잘했어."
"......"
나는 왜 엄마에게 같이 가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안 와도 된다고 했을까.
언뜻 이야기를 보면 꽤나 씩씩하고 당찬 아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부러웠다. 함께 와준 엄마를 가진 아이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부럽다고 마음속으로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기대를 많이 받았다.
지금 와서 엄마의 입장을 들어보니 그럴 만했다.
만 2세에 한글을 읽을 줄 알았고 5살 때는 영어 동화책을 다 외웠으며
학교 들어가기 전에 두 자릿수 더하기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 내게 100점은 잘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오히려 하나라도 틀리는 날은
추궁을 당했다.
"왜 틀렸어?"
글쎄, 몰라서 틀리지 않았을까
왜 틀렸냐는 질문은 질문의 형태가 옳은 것이 맞나 싶다.
칭찬스러운 칭찬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시원스럽게 잘했다 기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점점 공부가 싫어졌고
중학생이 되어 첫 중간고사에서 평균 85점을 받았을 때는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게 도대체 뭐야, 공부를 한 거야 만 거야."
반에서 11등이었다.
나는 사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게 왜 이 정도로 꾸중을 들어야 하는 일인가
무릎을 꿇고 앉아 저조한 성적에 대한 추궁을 한참 들었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나에게 말했다.
'잘했어, 지애야. 이 정도면 잘했지. 공부한 거에 비하면 잘 나온 것 같은데?'
라고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나도 모르게
나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너무 듣고 싶었으니까.
잘했다고,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이가 없어 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엄청 긍정적이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자존감이 높아요?'
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저 어릴 적부터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는 응원을 스스로 하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엄마도 와주면 좋겠어요."
라고 했어야 했다.
나도 엄마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사실 어른이 된 지금도
엄마의 응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도
필요하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
"잘 지내지?"
"네, 저는 잘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