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인생의 2막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른 바 암흑기라고 여기는 취준생 시절에는 알바 이력서 꽤나 써 본 사람이었다. 안 돌려 본 업장도 없었다. 이렇다 할 경력도 내세울만한 스펙도 없는 시절에 믿을만한 건 젊은 나이 하나 뿐이어서 배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부딪치기도 참 여러번 부딪치고 깨지기도 산산조각으로 깨졌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구구절절한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써서 조간신문처럼 돌리지만 취업을 하고 나면, 취업만 한다면 다시는 이력서를 써서 돌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 인생에 다시는 이렇게 절박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때가 있더란다.
젊었을 때는 철이 없었다. 철이 없으니까 다시는, 이라는 말을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있던 거였지.
결과적으로 나는 취업을 해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후에도 꾸준히 이직을 위한 이력서를 업데이트 해 성공적이거나 혹은 절망적인 이직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꾸준하고 점진적인 성장말고 내세울 게 없었던 이력서가 한 장,두장, 세장으로 두꺼워 질 때 쯤 나는 다시 10년만에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쓰게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채용 시장의 변화 속도야 더 말할 것이 없다. 구직은 들여다보지도 않겠다던 되먹지 못한 취준생이었던 나도 일찌감치 현실을 깨닫고 이직없이 드라마틱한 연봉 인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구직 사이트를 점검하며 내 몸 값을 올릴 방법을 생각했고, 다행히 그 시도들은 나를 설명해 줄 두 장의 종이를 세장, 세장에서 네 장으로 늘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화려한 수치와 길어만 가는 이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해준 것이 '대학원'이었다.
그렇다. 대학원생이 되었다.
전략적으로 쌓아 온 경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허무맹랑하게도 <꿈>이었다. 언젠가 도달하고 싶었던 그 자리, 되고 싶었던 사람. 없는 것처럼 지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뜨거워서 차마 꺼내보지 못하고 벅찬 희망에 긴 밤을 새우도록 그려보았던 가고 싶은 미래.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한 한 걸음이 대학원 합격이라는 종잇장과 함께 현실의 초입이 되어 내게 날아왔다.
13년차 직장인. 내 나이 마흔을 목전에 두고 덜컥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되어버렸다.
직장과 병행이 가능한 특수 대학원도 아니고 당당히 주간 수업 일정이 있는 대학원 합격증을 받아들었을 때 처음으로 했던 생각은 <... 아르바이트 해야겠다.> 였다. 직장인의 정체성으로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아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0년 내지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직장에 바치고 새로 출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다. 브런치는 물론이고, 서점에 깔린 책장에서도 꼭 한권씩 보이는 것이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 출발하는 선배들의 좌충우돌 인생담이다. 그러나 나는 대기업 직장인도 아니었고, 이름난 세계기업의 엔지니어도 아닌 그저 10년간 중소기업을 연연하다 겨우 중견기업에 자리를 잡아 대리로 경력을 채우고 과장의 진급을 앞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지만, 너무 어이없게 펼쳐졌잖아.
어쨌든 10년만에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에 접속했고 이력서 작성하기를 클릭하고 30분째 멍하게 앉아있는 중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왜 관련 경력도 전공자도 아닌 나를 대학원이 떡하니 받아준거지.
그나저나 요즘 아르바이트 이력서는 적어야 할 칸이 별로 없군요.
경력기술란이 따로 없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의 규모를 적어도 되는 것인가요?
일본어와 영어 비지니스 통번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형화된 점수 이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는건가요?
이제 자기소개서에 내 성격의 장단점이나 팀원과의 불화를 극복한 경험을 쓰지 않아도 되는건가요?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을 가진 사람을 과연, 카페 아르바이트로 써 줄까요?
물론 제가 단지 카페일만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닙니다.
10년만에 따뜻한 요람같았던 회사 밖을 나와 정글같은 사회에 던져졌다.
정말인지 회사 플랫폼과 양식, 명함이면 다 통했던 온실속의 화초처럼 살았는데
밖을 나와보니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습니다.
저 같이 얼렁뚱땅 제 2막의 인생을 열어버린 선배님들을 찾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