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나는 생초짜다.

신세계를 경험한 이후의 인간은 늘 겸허하다.

by 오도문이


13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하니 당연히 쉽지 않겠다, 는 생각은 했어도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예견하지 못했기에. 하루하루를 놀라움과 좌절이 번갈아 타격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러고 보니 온실 속 정규직일 시절에는 이런 초조함을 느끼지 못했구나. 우선, 모든 절차를 헤드헌터들을 통해서 진행했었고 면접 예상 질문이나 회사의 성향, 포지션의 내용등 이력서만 잘 써서 보내주면 내가 신경써야 할 일들은 거의 없었다. 회사에서의 합불합 소식까지 모두 헤드헌터들이 진행해줬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름 마음고생을 했다고 해도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한 자리를 구할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곳에서도 전화가 안 오지.

이력서를 그렇게 쏟아냈는데 한 곳에서도 면접을 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이 탓인가 싶어서 (사실 경력에 비해 나이가 많지 않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르바이트 채용시장에서 각광받는 나잇대는 따로 있는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일부러 사무보조 쪽으로 많이 이력서를 넣어 보았는데 한 곳에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이력서의 문제일까 싶어서 이력서를 이리저리 고치고 원투데이 이직을 했던 게 아니었으니 그 때의 스킬을 살려서 자기소개서도 좀 더 다듬고 직무 경력도 좀 더 자세한 내용을 기입했는데도 열람은 해도 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온실 속 정규직. 채용한파의 추운 맛을 제대로 경험중이다.

아니, 내가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이었나? 나름대로 한 파트를 이끌기도 했었는데, 이렇게나 실용성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게 한순간이라고? 맞은 것처럼 얼얼한 뺨을 붙잡고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뒤지고 또 뒤져봐도 어제 봤던 그 공고, 엊그제 서류를 보냈던 그 공고의 연속이라 사이트를 닫아 버렸다.



당근을 뒤적이는 것은 중고만화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루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 당근에서 아르바이트도 구할 수 있더라고요?

세상의 변화는 빠른데 온실 속 사무직은 따뜻한 4대보험을 달달하게 누리다 인큐베이터를 갓 나온 아기에 불과해서 당근으로 채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엊그제 알게 되었다.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경력을 모두 내세우지 않고 일본 유학 경험을 살려 일본어 통역 아르바이트에 몇개 지원해 보았다.



놀랍게도 연락이 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요즘 유행하는 퍼스널 컬러를 진단하는데 일본 손님들이 간혹 계셔서 그 분들의 통역을 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일단 높은 시급과 유연한 일정에 지원을 해보았다. 비지니스 통역은 자주 (회의 통역 전담이었으므로) 해보았지만 그 외 분야의 통역은 처음인지라 업계 용어도, 분위기도 모두 낯설것이라고 생각해 통역 전에 미리 현장을 견학할 수 있는지 여쭤보았고, 사장님은 흔쾌히 괜찮다고 해주셨다.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 처음으로 뷰티업계에 발을 담그다.








이렇게 몰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나도 모름의 현장이 그대로 담겨있는 메모.




세상에 피부의 질감을 표현하고, 컬러를 설명하는 단어중에 그렇게 다양한 어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비지니스 통역은 추상적인 단어가 별로 없었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어휘들이 거의 없어서 비교적 적확한 단어를 금방 통역해낼 수 있었지만 뷰티업계의 통역은 그야말로 "느낌"과 "감각"이 너무나 중요한 요소여서 하나의 컬러만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말이 스무가지도 넘어 보였다.



평소에 그냥 지나치며 대충 흘려 들을 말들도 통역을 하려고 마음먹으니 달리 들렸고, 추상적인 표현들은 내 나름의 어휘 기준을 가지고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있도록 재점검해서 용어집을 하나 작업해 두었다.



아직 정확한 통역 일정은 잡히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업계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것이 틀림 없었다. 이 정도면 나름 사회 생활 오래 해오지 않았나, 자신했던 자만심을 한방에 바닥에 떨구고 두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새로운 세계에 한 방 얻어맞은 나는 지난 주말부터 후유증이 크다.



돌아보니 새로운 시작점 앞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회사가 나에게 제공해 준 안락한 정체성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수그리고 겸허해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겨우 나만큼의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현실로 깨달았기 때문에.



어쩌면 성숙해진다는 것은, 현명해져 간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별 거 아닌 인간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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