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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 김세미 Jan 08. 2024

눈이 준 선물


친구와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서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쉬운 대로 아파트의 게스트룸을 빌려 파자마 파티를 계획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짖눈개비가 내릴게 뭐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가 도움을 안준다고 하염없이 눈을 뿌리는 하늘을 원망했다. 눈이 애물단지처럼 여겨지니 성가실정도다.  조금 내리다 그치길 바랐건만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그칠 기미가 안보인다.  눈 때문에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며 집을 나섰다.



불규칙하게 내리는 눈은 느리게 느리게 하강하며 손을 잡고 결속을 다지는 모양새다.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눈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다. 어느새 온 세상을 덮을 기세로 내린다.  넉넉한 풍채를 자랑하는 함박눈이다. 우르르 모여들어 모두 덮어버릴 맹렬한 기세라 산속에서  만난다면 파묻힐 거 같았다.



행여 넘어질 세라 눈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커피숍에 들렀다. 친구가 좋아하는 원두를 고심 끝에 골랐고 아이들을 위한 슬라임도 사러 갔다. 평소라면 절대 사주지 않는 품목 중 하나지만 골라보라 하니 제일 비싼 걸로 4개를 고른다.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눈치챘으나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곳간에 인심 나는 날이니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버스로 환승하는 노선을 택한다. 중간지점으로 마중 나오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제설작업이 눈 내리는 속도를 못 따라잡을 듯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펑펑 내리는 눈을 보니 어느새 마음이 녹았다. 설렘을 장착한 여행자의 눈이되어 눈을 바라보게 되었다


예상대로 도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버스 도착 정보가 전광판에 표시 안되고 몇십 분이 지났단다. 차가 안 오면 연락을 하라 했지만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몇 분의 기다림 만에 탑승했다. 몇몇 구간은 제설작업이 안돼 운행이 안된다는 버스 아저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해당 구간을 패스하는 덕에 더 빨리 도착하게 되었다. 급행열차를 타는 기분이었다. 차창 밖 풍경은 강원도의 산간지역을 연상시켰다. 이렇게  넉넉한 눈을 본게 몇 해 만인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소복소복 쌓인 눈이 더없이 고왔다. 마침 제설 차량도 우리 앞을 지난다. 버스 아저씨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안심하시니 덩달아 기분이 좋다.


눈 덮인 산을 마음껏 감상하며 도착하니 또다시 펼쳐지는 설경. 눈이 시원해졌다. 한차례 눈놀이를 끝낸 친구와 딸이 등장했다.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었다고 자랑을 한다. 당근까지 가져가 예쁘게 꾸며놨다고 언니 손을 이끈다.


게스트 룸에 짐을 풀고 아파트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눈사람 만들기가 한창이다. 혼자 만들었다는 멋진 눈사람을 자랑하려는데 당근 코가 실종. 더구나 다른 친구들에 의해 또다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인심 좋게 양보하고 또 다른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조경이 잘되어 있는 단지는 리조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나무와 향나무에 수염 처럼 눈이 가득 덮이고 공작 단풍의 우산 같은 나뭇가지마다 눈이 층층이 쌓였다. 나무의 눈꽃은 거대한 안개꽃과 하얀 목화 다발을 연상시켰다. 눈에 한가득 눈을 담고 있는데 눈 위에 하얀 양탄자처럼 눕는 아이들이 보였다.


"엄마,  나는 눈 위에 한 번도 안 누워 봤는데 그다지 눕고 싶진 않아요. 다 젖을 것 같아서요"


 강한 부정은 긍정임을 아는데 어려서부터 한 깔끔하는 딸아이가 눈앞에서 머뭇거린다. 적셔도 더러워져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눈놀이는 할 생각이 없단다. 하지만 눈 나라에 입장한 몇 분 만에 닫혔던 아이의 마음이 금세 녹았다.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닌다.


'아이쿠 ,  넘어져 버렸네 ..'  일부러 넘어지는 동생을 보더니.  바닥에 누우면 어떡하냐 걱정하는 말투다. "언니도 누워봐 엄청 푹신해,, 어서  "  머뭇거리던 아이는 동생의 표정에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며 눈을 질끈 감으며 펄썩 눕는다.  이내  구름 위에 떠있는 느낌이라고 사진을 찍어달란다. 무장해제다.


눈앞에서 무장해제 된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눈을 굴리고 썰매를 타는 어른들의 목소리도 웃음이 베인다.  ‘눈을 굴려서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자’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엄마도 그 노래 알아요? 아이가 묻는다. 동작을 기억하는지 즉흥적으로 나오는 노랫말이 신기했다. 노래를 부르며 눈을 굴리니 몇 번의 동작만으로도 동글동글 해졌다.


삐죽거리던 마음들도, 정리되지 않아 미련이 남았던 일들도 눈 속에 넣고 굴렸다. 맨들맨들해진 눈덩이의 표면을 만지니 마음까지 부들부들 해진다. 이렇게 눈까지 준비해 놨다고 완벽하지 않냐고 너스레를 떠는 친구에게 엄지 척을 해주었다. 집에서 맞이했다면 이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텐데 특별한 공간에서 맞이한 눈은 선물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 덕에 눈을 제대로 즐기고 숙소에 돌아와 한 해의 소회를 나눴다. 연초에 글쓰기를 시작했다며 나에게도 권했던 특별한 친구덕에  나를 찾아 떠나는 특별한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주변을 관찰하는 새로운 눈을 갖었고. 안경도수를 올린 것처럼, 흐릿하던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올해가 특별한 건 쓰기를 놀이처럼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얘기해 줬다. 덕분이라고 .


눈에 눈을 가득 담고 눈덩이를 굴리며 눈과 함께 즐긴 하루. 아쉬운 일들은 하얀 이불같은 눈속에 덮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라 귀뜸해준 눈에게 안부를 전한다. 새로운 눈으로  눈을 맞이하겠다는 다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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