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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남자와 해변을 걸으며

조지, 보홀

by 이세계 Mar 19. 2025

1년 정도 다닌 회사를 퇴사한 후,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에게 주어진 1주.

이 한 주를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까 하다가 그동안 가고 싶었던 필리핀 보홀로 가게 되었다.

고작 3박 5일 일정이었지만, 그동안 고생한 과거의 나와 앞으로 고생할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내가 주는 상여금 같이 단 여행이었다.

사실 무계획도 계획이라고 이번 여행은 그저 푹 쉬다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곳을 다니고..

물론 필리핀의 물가는 한국이랑 비슷했고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분명 기대 이하였던 점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연이 생겨 글을 끄적여본다.


때는 여행 3일 차, 다음날은 밤비행기라 실제로는 보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날은 호핑투어를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 전날에 호핑투어를 예약한 후, 오전 7시부터 퉁퉁 부은 얼굴로 호핑투어 배에 탔었다.

내가 탄 호핑투어는 각 일행마다 현지 스태프를 한 명 이상 배치해 주는데, 난 혼자 간 거라 스태프가 한 명이 배정되었다. 그의 이름은 '조지', 그리고 그가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하.




당연하게도 그가 내 또래라는 것과 이름이 조지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투어를 시작했고, 배 안에서는 정신없이 맛있는 걸 먹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 나도 그도 아마 그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호핑투어 중 찍은 돌고래호핑투어 중 찍은 돌고래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건 호핑투어 중간에 들리는 발리카삭이라는 섬에서부터이다.

이 섬에서는 자유시간을 20분 정도 갖는데, 보통은 일행끼리 사진을 찍지만 나는 혼자 간 거라 조지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내 사진을 찍어줬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얘기가 너무 잘 통하는 게 아닌가. 조지는 장난기가 많은 성격이었고 영어를 능숙하게 했었다. 물어보니 전 여자친구가 영국인이라 그렇다며 아주 자연스럽게 연애 얘기도 하는 등 흥미롭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슬쩍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보는 조지. 원래 해외에서 누군가랑 친구가 되면 인스타 아이디 먼저 물어보는 게 국룰이긴 하지만, 이렇게 현지 스태프랑 친구가 되긴 또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렇게 나의 출국을 하루 앞둔 날, 우리는 인스타 친구가 되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그 친구가 나에게 인스타를 물어볼 수 있었던 이유는, 알고 보니 그가 오늘이 마지막 근무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끝난 후 세부로 갈 거라던 그 친구는 그날 몇 마디 DM을 보냈었다. 사실 여행지에서 만난 시절인연보다는 내 일정이 더 중요했기에, 그날 호핑투어가 끝나고도 다른 여러 일정을 소화하고 드디어 저녁이 되어 나는 그 연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이 내 마지막 근무날이라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었어. 너는 뭐 해?'  

'난 이제 일정을 끝내고 저녁 먹는 중이야.'

'그 후에는 뭐 해?'

'나 아마 바에 가서 맥주 한 잔 할 것 같아'

'그래? 나 친구들이랑 10시 정도에 헤어질 것 같은데. 혹시 그때 시간 돼?'


순간 당연히 걱정이 먼저 앞선 건 세상이 워낙 무섭기 때문일 것이다. 믿을 놈 하나 찾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이 청년의 뭘 믿고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시간 되면 연락할게.'


브런치 글 이미지 3




일단 그렇게 연락을 보내놓은 뒤 혼자 바에 앉아 맥주를 한 잔 시키면서 고민을 시작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자주 가긴 하지만, 이렇게 현지 인연을 만들어본 적도 없고 이런 애프터(?)를 받아본 적도 전무했다.

당연히 걱정도 되고 무서움도 있고 이상한 곳에 데려가면 어쩌지라는 고민도 있었다.

친구한테 이 얘기를 하니 친구가 '정 걱정되면 가지 마~'라고 연락이 와서 정말로 조지와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그 밤은 바람이 너무 좋았다. 혼자 가만히 앉아서 부드러운 생맥주를 마시는데 취기 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보홀의 밤은 담백하지만 화려하게 빛났다. 여느 동남아가 그렇듯 10시가 다 되어갈수록 바에 사람은 점점 더 차고 음악은 신나고.


이상하게 그럴수록 나는 외로웠다.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이 밤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밤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스쳐가고 내 몸을 지나쳐 맥주잔에 엉겨 붙어 방울방울 열리는 순간, 

나는 조지에게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여간 뭐든 외로움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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