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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윗 Jun 10. 2024

나의 장소

나만의 힐링 공간

류시화 시인님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내면의 성소’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내용이 내 주의를 끌었다. ‘내면의 성소’라니, 무슨 뜻이지? 가톨릭 신자라 평상시에도 성지순례나 성당, 사역지 같은 거룩한 장소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책에서 다루는 내면의 성소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나 보다.

책에서는 심리학자 ‘칼 융’의 돌집을 주제로 내면의 성소에 대해 다루었는데 융은 스위스 볼링겐 마을에 둥근 탑 형태의 돌집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사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연구 자료가 인용되고 회자되고 살아있을 당시에도 명망 있는 심리학자가 호화스러운 저택이 아니라 돌집에서 지내다니,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20세기 버전인가 싶었지만 융에게 돌집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처 이자 휴식처이고 심리학자인 그를 연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 준 공간이었다 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억•꿈•회상’도 돌집에서 집필되었다고 하니 융 선생님도 돌집에 꽤나 진심이셨나 보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일상에 찌들 대로 찌들어서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이라며 손을 흔드는 여자캐릭터의 그림을 남겨둔 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공간이 있다. 융의 돌 집처럼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공간. 바로 내가 사는 동네의 무인 숙박시설이다


  내가 무인숙박 시설을 이용하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나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다섯 마리의 고양이들을 돌보며 혼자 자취하는 직장인 청년이다. 직장생활과 학과공부, 그리고 기타 자기 계발을 안정적으로 계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집에서 만큼은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다섯 마리의 고양이들의 물과 식사를 챙겨줘야 하는 데다 성격들이 제각각이라 수시로 집안을 뒤집어엎어놓고 또 자취를 하다 보니 집안 살림까지 나 스스로 해야 해서 바람과는 달리 슬프게도 집에서는 온전히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가 없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는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고양이 주인님들의 밥과 물그릇을 새로 갈아주는 등 유능한 엘리트 고양이 집사로써의 본분을 다해야 하며, 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는 근무복을 미리 준비하고 속옷이나 양말, 일상복 등을 미리미리 빨아놓아야 한다 슬프게도 이렇게 고생하는 청년의 밥을 차려줄 사람이 없기에 밥도 내 스스로 차려 먹어야 하고, 설거지 또한 내가 해야 한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미혼 청년인데도 혼자서 육아하는 싱글대디 수준으로 바쁜 생활을 이어나가다 보면 피로가 누적되어 예민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인상이 찌푸려지게 된다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나 찾지 마. 가출할 거야’ 이니까


내가 무인텔에 맛 들린 시기가 아마 2023년 12월 말쯤이었을 거다.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고생한 나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쉬게 해주고 싶었으며 때마침 번아웃도 왔던 때라 내 인생 시나리오가 2023년에서 끝나지 않고 2024년에도 정기연재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힐링의 시간이 필요했다. 동생에게 고양이들을 부탁하며 오후에 근처 발이 닿는 곳으로 걷다가 눈에 띄는 숙박시설 중 아무 곳이나 들어가 숙박권을 끊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대자로 뻗으니 ‘아 여기가 천국이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며 황홀감에 스르륵 눈이 감겼고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치킨과 피자에

콜라까지 곁들여 먹으니 머릿속에 떠오르거라고는  ’ 자유‘ 와 ’ 행복‘ 두 단어뿐이었다. 이런 행복함을 맛본 후 난 일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지인이나 동생에게 집을 부탁 한 뒤 숙박시설에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는 게 나만의 일종의 ‘호캉스(호텔 +바캉스의 합성 신조어)’가 되었다.


무인텔에서 휴식을 취할 때면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혼자 자취를 한다고 해도 고양이들과 함께 사는 데다가 이 아이들이 나를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에 집에서는 내가 어딜 가나 항상 따라다니는 고양이들로 인해 온전히 집중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음에도 항상 방해를 받곤 하는데 무인텔에서는 내가 잠을 자던, 책을 읽던 또는 넷플릭스를 보던 자유롭다. 심지어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근처 편의점에서 군것질 거리를 잔뜩 사서 영화를 보면서 먹는 그 쾌감이란..



 ‘모텔’ 또는 ‘무인텔’이라고 불리는 이 숙박시설은 그동안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회인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불륜의 메카’, ‘술 취한 남녀가 몸을 섞는 공간’ 등으로 비치는 통에 모텔 입구에 서있으면 으레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기 일쑤였지만, 요즘은 호텔에서 하루종일 뒹굴며 노는 ’ 호캉스‘라는 문화가 젊은 층들의 새로운 취미로 떠올라 기쁘다. 오죽하면 2019년에 KBS에서 방영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딸’ 드라마에서 극 중 큰 사위로 나오는 이원재 배우님이 퇴근 후 자신만의 취미공간을 위해 모텔을 장기 대여하는 에피소드가 나올까. 공중파 드라마에서도 다룰 정도면 현대인들에게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이나 휴식처가 꼭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요즘은 MBTI라는 성격유형이 유행을 하면서 그중 I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내향적이라 쉬는 날 집에 있는 문화인 ‘집 콕(집에 콕 틀어박혀 있다 의 줄임말)’을 하고 상호 간에 이를 인정해 주는 문화도 생겨가고 있다. 하지만 1인가구가 아닌 이상,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기는 힘든 게 현실인 거 같다. 나는 요즘도 고양이들이 새벽에 밥 달라고 깨우거나 독서 중에 놀아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육묘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달하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외박을 한다. 시간적으로 여유로울 때는 홀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지금도 머릿속에서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해맑게 손 흔들며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저만의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라고 외치는 여자 캐릭터 사진으로 바꿔놓고 휴대폰을 집중모드로 바꾼 채 어딘가로 가서 쉬고 싶다. 큰일 났다. 중독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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