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텅빈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는 돌을 베고 누워 나비 꿈에 빠져버렸네 바람과 이슬에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깨어 보니 옷이 흠뻑 젖었네
[청와 론]
1. 호접몽(蝴蝶夢) 원전
昔者莊周夢為蝴蝶, 栩栩然蝴蝶也, 自喻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蝴蝶與, 蝴蝶之夢為周與? 周與蝴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거이 날아다녔는데, 나비가 진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자신이)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누워있는 게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는 것인데. 이를 일컬어 '물화(物化)'라고 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2. '호접몽'에 갇힌 꼴
장자의 '호접몽' 얘기는 <장자> 전체를 꿰뚫는 우언(寓言)입니다.
'호접몽'의 대전제는, 세상살이가 어차피 모두 '꿈(夢)'이라는 겁니다. 그 꿈 속의 '너와 나'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미몽(迷夢)'이라는 거지요. '너와 나'를 잊으면(忘我忘物) 시비(是非)가 사라지고, '대몽(大夢)'에서도 벗어나 물아가 일체가 되는 '물화(物化)의 세계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齊, 가지런히 한다)' '물론(物論, 다양한 주의주장)', 즉 다양한 주장을 가지런하게 조화시킨다는 거지요.
'호접몽'으로 인해 인간 삶의 모든 것이 '꿈'이라는 큰 틀에 갇혀 버린 겁니다. <삶이, 세상이 모두 꿈이다>라는 대전제를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있으면, 깨어나면 됩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대전제를 바꾸거나, 대전제에 예외를 두거나 해야합니다. 그러면 대전제로서는 결격 사유가 되긴 하겠습니다만.
그것이 깨달음이고, 망아망물(忘我忘物)이고 그럴 테지요.
3. '호접몽'에서 깨어나도
그런데 '호접몽'에서 깨어나도 꿈 속입니다. 그건 또 왜 그럴까요?
이제 장자가 제시한 '호접몽'의 대전제가 아니라, 청와가 제기하는 언어의 대전제 때문입니다.
깨달음과 망물망아를 통해서, 인간은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뿐이고, 심지어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철저히 '인간의 언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4. 만물의 몸말과 인간의 언어
그 언어몽(言語夢)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언어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탁월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영역,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을 열어젖힌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물이라고 하는 물질은 몸으로 존재합니다. 몸이란 큰 몸에 모여있는 모임이면서, 작은 몸들을 모아놓은 모음입니다. 그야말로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사회(社會)입니다.
몸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관계란 이어져 있다는 것이고, 이어져 있다는 것은 무엇이 되었거나 간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존재든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되었거나, 느낌이 되었거나, 언어가 되었거나 관계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말만 말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모든 것이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존재 자체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이유가 되면서 관계를 맺어갑니다. 몸을 가진 모든 것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관계를 맺는 몸의 존재방식을 몸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몸말은 물질적인 말, 감정적인 말, 기호적인 말의 양식으로 존재합니다. 우주는 어마어마한 말의 체계입니다.
무생물계의 몸은 물리화학적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그것을 넋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물계의 몸은 물리화학적 정보에 정의(感情과 意志)적 정보를 담아 주고받습니다. 그것을 얼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계의 몸은 물리화학적 정보에 정의적 정보와 언어적 정보를 기호에 담아 주고받습니다. 그것을 뜻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몸말은 물질적인 말, 감정적인 말, 기호적인 말 등 세 가지의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만물이 주고받는, 모든 몸이 주고받는 모든 정보를 몸말이라고 했을 때, 그 몸말이 곧 만물이 간직하고 있고 주고받는 마음입니다. 몸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자체 내에 생성시켜가는 모든 정보들이 마음이고, 몸과 몸이 서로 주고받는 모든 정보들이 마음일 따름입니다.
인간의 언어도 몸말이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언어 이후 인간은 몸말 안에 입말과 글말이라는 뜻말을 새로 지어냈습니다. 뜻말을 창조해 낸 겁니다. 이 뜻말의 창조야말로 제가 늘 얘기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이라고 하는 근본원리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 뜻말로 인해 자아(自我)가 탄생했고, 인류문명이 탄생했습니다.
넋말-얼말이라는 몸말과 뜻말이라는 몸말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넋말과 얼말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쓸 수 있는 본능이고 자연인 무위(無爲)의 말입니다. 이에 비해 뜻말은 애써서 배워야 쓸 수 있는 기능(技能)이고 문화인 유위, 인위, 작위, 허위(有爲, 人爲, 作爲, 虛爲)의 말입니다. 자아의 장난(作亂)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인간의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5. 어찌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말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방편(方便)이라는 역설(逆說)로, 유교는 정명(正名)이라는 학문(學問)으로 그 뜻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방편적 정명'이라는 과정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끊임없이 언어를 갈고 닦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名)이 유일한 정명(正名)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주고 받는 느낌과 몸말에 귀기울여 주는 것이 교감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이상의 깨달음을 모두가 이루면 좋겠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모두가 그것을 다 이루어야하는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6. 율곡의 호접몽은 어찌 되었을까요?
달빛 아래 텅빈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는 돌을 베고 누워 나비 꿈에 빠져버렸네 바람과 이슬에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깨어 보니 옷이 흠뻑 젖었네
또 다시 취생몽사(醉生夢死)를 생각하게 합니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무엇엔가 취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진하디 진한 무엇이 '언어'입니다. 그것이 제가 제기하는 '언어몽'입니다.
그런 줄 알기만 하면 벗어날 수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습(習, 濕, 버릇)이 너무 깊습니다. 옷이 다 젖어 버렸습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일단 그런 줄 알아야겠지요. 그 깊은 병에 대한 처방은,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깨어있어라'라고 하는 선현들의 말씀뿐입니다. 죽을 때까지 '언어라는 깊은 꿈 속에서 깨어있기'를 바래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