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초롱 Feb 27. 2024

아빠가 없는 날은 왜 더 힘들까

분명 똑같은 별 것 없는 하루였는데

집에 아빠가 없는 날은 주의가 필요하다. 머피의 법칙처럼 힘든 일들이 터지니까. 유난히 아이가 떼를 더 쓴다거나, 물이 쏟아진다거나, 잠을 안 잔다던가, 한 번쯤은 감정이 이성을 누르는 버튼이 눌러진다. 그럼 둘 중에 한 명은 울음이 터지고, 일하느라 바쁜 남편을 원망하고, 종국에는 내가 드러눕겠지. 도대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어떻게 버티는 걸까.


월요일부터 저녁에 회사 회식이 있는 짝꿍을 배웅했다. 영재는 새벽동안 코가 막혀 잠을 설쳤고, 덩달아 나도 몸이 으슬거렸다. 시작이 좋지 않다. 종합 감기 상비약과 타이레놀을 삼켰다. 어렸을 때는 웬만하면 병원도 안 가고, 약도 복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반나절에서 하루, 잠자고 일어나면 좋아졌으니까. 이제는 타이레놀이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사다 두고, 두통이 시작된다 싶으면 미리 찾아 먹는다. 잠으로는 해결되지 않기도 했지만 마냥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겨우 아이를 느지막이 어린이집에 보냈다.  


하원하러 가는 길이다. 아이가 없는 시간은 두세 배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잠자리에 들며 결심했던 수많은 일들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내일로 미뤘다. 그래도 하루의 최대 과제인 저녁 메뉴 초벌은 해뒀다. 어제저녁으로 김밥을 했더니 "오늘은 왜 반찬이 많이 없나요?" 질문이 신경 쓰였던 터다. 잔반이 많이 남겠지만 영재가 좋아하는 닭날개떡조림, 고구마스틱, 명란계란말이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곧장 집으로 가면 좋을 텐데, 옆 놀이터로 향한다. 여태 친구들과 놀았을 텐데도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찾고 있는 단짝 친구는 다른 일정으로 만나지 못했다. 무리 지어 있는 어린이집 엄마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모여 시끄러운데 차마 끼지 못하고 멀치감치 아이를 따라다녔다. 영재도 마음 맞는 사이가 아니면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게 나를 닮았다. 동생이 쏘는 버블건 뒤에서 비눗방울을 터트리고, 로봇 장난감을 유심히 쳐다만 볼 뿐 '나도 한번 해봐도 돼? 같이 놀자!'가 없다. 주춤거리는 사이 다른 활기찬 아이에게 자리를 빼앗기자 아쉬운 듯 나에게 안겨온다. 


해가 길어졌나 보다. 어둠을 핑계로 놀이를 끝냈는데, 아직도 한창 밝다. 뒤늦게 발동이 걸린 아이는 돌아가는 아이들을 쳐다본다. 평소에는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했는데, 오늘은 따로 마감시간이 없다 보니 식탁 차림이 늦어졌다. 책을 읽고 있던 아이를 부랴 불렀다. 당연히 한 번으로는 안된다. 아들은 청각이 약하다고 하던데, 과연 말을 듣기는 했을까. 대답도 없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더니 다시 책장으로 간다. 혼자 밥을 먹기 시작하는 내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뒤늦게 합류한 아이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는 내 손을 끌어다 뽀뽀를 했다. 근데 왜 밥상에 레고 조립설명서를 가져온 거니?


"엄마가 밥 다 먹으면 식사 시간 끝이야. 다 치울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대한 천천히 먹었다. 내 밥공기를 힐끗 보면서 먹는 게 아주 잠깐 안쓰러울 뻔했다. 기껏 해둔 반찬들을 제쳐두고 고구마스틱 몇 개에 밥만 먹더니 가져온 레고 설명서를 한 장씩 넘겨 본다. '저기, 엄마 화났잖아. 분노 스위치 누르기 직전인 거 안 보이니?' 나와 비슷한 속도로 밥은 맞춰 먹었지만 반찬들이 못 먹는 장식인 양 그대로 있었다. 


입을 닫았다. 입을 열면 참았던 소리가 함부로 울려 퍼지고, 영재가 울어 버리는 장면이 상상됐다. 남편이 보고 싶었다. 종종 화에 휩싸이는 나를 대신해 기꺼이 육아 바통터치를 받아 줄텐데. 조용히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잘도 혼자서 놀거리를 찾는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좋을 텐데 금세 잠긴 문을 철컥 돌린다. 왜 안 열리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쾅쾅 문을 거세게 쳐댄다. 종이 소방차에 사다리를 붙여야 되는데 스카치테이프가 안 뜯어져서 나를 찾아온 거다. 결국 문을 열고 침대에 앉아 책을 보는 옆에 자리를 잡았다. 


" 엄마 기분이 어때 보여? "

" 모르겠어."

" 좋아 보여? 화나보여?"

" 좋은 것 같아."


이럴 수가. 내가 화날 때마다 뽀뽀를 해댔으면서, 엄마 기분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는 거니. 오늘따라 소통이 힘든 너와 나구나. 제대로 같이 놀지도 못하고, 자야 되는 시간이 왔다. 아이를 눕히고 힘들었던 하루에 대해 운을 뗐다. 말주변이 없어서 화가 나면 말 한마디를 못하고 눈물 먼저 났는데,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진 말들이 풀어낸 상황은 별 것 아닌 것 같았다. 아이가 아니라 내가 떼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 기분 나쁜 줄 몰랐어. 지금 말해줘서 알았어."

"그래. 엄마도 더 표현하도록 노력할게."

"나도 아까 울 뻔했어."

"언제?"

"문 안 열렸을 때.. 엄마가 잠갔어?"

"왜 열어 달라고 안 했어?"

"맨날 깜빡해."

"엄마도 깜빡하는데, 영재는 엄마를 닮았구나. 이제 문은 안 잠글게. 그건 엄마가 잘못했어."  


부부싸움만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게 아니라 자녀와의 갈등도 잠들기 전에 풀어야 되나 보다. 덕분에 아이도 나도 어제의 피곤을 뒤로한 채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엄마는 강인하고 위대한 존재라는데, 나는 나약하고 부족하기만 하다. 그래도 오늘 한걸음, 엄마로서, 어른으로 더 성장한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짝꿍에게 쓰는 공개 연애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