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도 고마운 너에게
책상에 앉아 메모지에 글감을 끄적인다. 일주일 넘게 작업을 안 해서 그런지 끌어당기는 소재를 찾기 쉽지 않다. 지금까지 브런치에 쓴 글들을 훑어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써볼까 싶다. 지금까지 썼던 대상이 남편, 어머니, 돌보미 선생님이었는데 이번엔 누가 좋을까. 문뜩 나에게 쓰고 싶어졌다. 매번 너는 왜 그러냐고, 잘 좀 해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으니까. 애쓰는 거 아는 건 나 밖에 없으니까 오늘은 너를 달래 볼까 한다.
나영아,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있어? 컨디션은 어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게 쉽지 않지?
요가 시간이 애매해 버리는 시간이 많다고, 동사무소에서 하는 2만 5천 원짜리 헬스장을 끊었지. 그냥 밖에서 달려볼까 했는데 잘 안 됐구나. 집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쓰고 싶다고 했잖아. 분명 작년 11월쯤에는 꽤 했는데, 지금은 밖에 나가지 않으면 왜 이렇게 게을러져? 꼭 돈을 지불하고, 커피숍을 가고, 그래야만 할 수 있는 거야? 그래. 그래서 너도 방법을 찾아낸 거지. 아이를 등원시키고, 바로 운동하고, 씻고, 요가하고, 작은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쓰고. 그럼 2시 넘어서 집에 도착해 점심을 챙기고, 저녁 준비하고, 하원하면 하루 완성이네.
와, 2주 동안 계획했던 대로 실행에 옮겼다니, 굉장한데. 그래서 지난주에 다친 발톱 핑계로 운동도, 요가도, 글쓰기도 쉬었구나. 손은 말짱했을 텐데도. 말은 안 했어도 빡빡한 일정 지키기가 쉽지 않았지. 완벽해 보였던 계획이었는데 실행하는 건 또 다르고. 바로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니 금방 지치는 것 같지. 지난 남편 휴가에, 영재 방학에 루틴 깨졌다고 자괴감에 빠져 우울해하더니 이번에도 또 그런 거 아니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항상 영재에게 이야기하잖아.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잘되면 좋지만 하는 게 즐거우면 된 거라고.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건 어린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냐. 거기다 너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있잖아. 육아나 살림이나. 때로는 하기 싫어서 질질 시간 끌다가도 결국은 앞에 서잖아. '오늘은 그냥 사 먹자고 하자, ', '하원만 시키고 누워있자.' 하다가도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베이컨 들어간 감자채는 만들 수 있겠다.', '남편도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다 오는데 아이는 씻겨 놔야지.' 하고. 즐거운 것보다 해야 되는 일들이 더 많은 것 같긴 하다 ㅎㅎ
월요일마다 정신 못 차리는 첫째 밥 먹이는 것도 일이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먹여본 사람은 얼마나 힘든지 아는걸. 처음엔 웃으면서 세상 다정하게 시작하지. 사방에 밥풀이 튀는 것도 모르고 다시 눈을 감는 아이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사정하고, 화내고, 결국 울고.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주변에서 너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종일 꿈쩍도 안 하고 누워서도 밥만큼은 삼켜주는 아이와의 이 감사한 시간을 잊지 말자.
이러려고 결혼하고, 아기를 갖었나 싶을 때가 있지. 젊었을 때는 사주에 있는 역마살을 증명해 보이듯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지. 대학 졸업하고, 워킹으로 2년간 있었던 호주 생각이 나네. 그때 너는 정말 반짝였거든. 어떤 일을 하던, 활기가 넘치고 당당했어. 농장에서 토마토 관련 일부터 호텔, 노인복지, 실험실까지. 모두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주저하지 않았지. 언젠가 외국에 정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바뀌었지. 어쩌다 가는 국내 여행도 아이 맞춤이 되었고.
그래도 행복하지 않니? 네가 그려왔던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에, 완벽한 가정은 아니더라도. 갈수록 대단해지는 짝꿍이나 (변치 않고 너를 1순위로 챙겨주고) 주는 사랑 이상으로 빛나는 아이와 함께 산다는 건 기대하지 못한 축복이야. 신이 너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 짓궂게도 꼭 시련 속에 기쁨을 마련해 두신다니까. 네가 정말 진심인지,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쉽기만 하면 삶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고, 절실함도 없잖아.
지금처럼만 하면 돼. 잘하고 있어. 너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지금은 마중물을 붓는 시간이니까, 생각한 대로 안된다고 자책하지 마.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건강 챙기는 거 잊지 마. 이렇게 너의 시간이 있는 것에 감사하자. 힘들면 쉬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가자.
너는 잘하는 게 뭐냐고. 여태 뭐 했냐고. 매번 핀잔만 줬지만, 항상 열심히 살려는 모습은 대단해. 혹시라도 결국 숨겨둔 영혼을 찾지 못했더라도 아쉬워 말아. 자기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은 정말 몇 없어. 그리고 그들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뤄낸 거잖아. 정말 손에 꼽도록 어려워서 위인이 되고, 세상에 알려진 거니까. 너는 너대로. 너와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렴.
걱정도, 눈물도 많은 나영아.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아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