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도 낭만은 포기할 수 없지
유년 시절 기억은 대부분 동네다. 우리 집, 옆 아파트 놀이터, 10분 거리의 초등학교, 지척에 있는 슈퍼와 만화 대여점. 좀 커서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가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3학년이 돼서야 시내라는 곳을 갔던 것 같다. 그 횟수도 다섯 손가락에 꼽지만. 고등학교도 30분 정도 버스를 탔는데, 이때부터 일탈을 꿈꿨다. 트루먼쇼 영화의 주인공처럼. 버스를 뒤로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매일 가는 장소도 옆으로 새면 헤매는 길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왔던 길이 어디였는지 헤매니까 정도가 심하다. 아무리 짧은 거리에 익숙한 경로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이니 핸드폰도 없고, 그렇다고 지도를 들고 다닐 일도 없다. 무슨 용기인 걸까? 같은 길을 외워서 가도 잘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인데, 굳이 지난번과는 달랐던 길을 골라본다. 곧장 걸어가면 40분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은 기본으로 채운다. 한 번은 두 시간 정도 흘렀나, 해가 저물어갈 때쯤 집에 도착하기도 했다.
단독주택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미로 탐험하듯 갈림길을 골라본다. 최대한 낯선 곳으로. 중간에 공사장과 마주쳤다. 2층 정도 되는 건물은 뼈대와 계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용한 걸로 봐서 인부들은 이미 퇴근한 것 같다. 콩닥콩닥. 주위를 살피다 조심스레 노란색 안전제일 가림막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 구겨진 신문지 뭉치를 보며 상상해 본다. 추위를 피하러 누군가 들어왔나. 아니면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3년이 지나 대학생이 되었다.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는 한 시간 동안 온갖 고민에 빠진다. 교우관계, 공부, 돈, 연애, 등 없는 걱정을 만들어서라도 해야지. 그래야 교정에서, 또는 한강에서 소주 마실 핑계가 생기지. 딱히 사춘기라 할만한 시기는 없었는데, 오춘기만큼은 자유의 힘을 빌려 나를 들뜨게 했다. 무엇이든 해도 되는 나이가 되었고 (물론 법과 도덕의 선을 지키는 선 안에서), 지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거나 구출 찬스를 쓸 수 있는 핸드폰도 있었으니까, 더 대담한 탐험을 해보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준비를 했다. 빠질 수 없는 맥주 한 캔, 안주로는 새우깡, 쓰다 만 다이어리와 펜. 이왕이면 한적한 시골 같은 분위기가 좋을 것 같다. 버스 옆면에 붙은 목적지들을 훑어보다 무슨 리로 끝나는 버스를 탔다. 번호 확인은 과감히 생략했다. 맨 뒷좌석에 앉아 바로 쏘아대는 에어컨 바람을 옆으로 돌리고, 창 밖을 바라본다. 꽤 시간이 흘러 승객은 세명 남았다. 바깥도 도시에서 논인지, 밭인지 모를 풍경으로 바뀌었다. 종점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냇가가 보인다. 물만 보면 앞뒤 안 보고 첨벙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여기다!” 더 가면 잠들 것 같던 정신을 깨워 멈춤 버튼을 눌렀다. 신발 안에 양말을 벗어두고 흐르는 물 사이의 큰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 흔한 사람 목소리도, 간헐적으로 신경을 거스르던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럴 때는 자연이 말을 걸어준다. 흐르는 물, 노래하는 새들 (새들마다 지저귀는 소리가 다르다.), 잘 들어보면 땀을 식혀주는 바람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가져온 준비물들을 하나씩 맛본다. 맥주 한 모금에 새우깡 10개쯤, 다이어리도 꺼내 시 같은 글도 끄적인다. ‘나 꽤 멋있잖아?” 속으로 자아도취에 빠졌다 금방 외로워졌다. 생각나는 이에게 전화를 걸으며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이 아깝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밖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없다. 목적지의 최단 거리를 찾아, 연달아 바뀌는 사거리 신호등을 예측해 뛰어간다. 길은 그저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이동하는 소모적인 공간이 되었다. 따뜻한 봄이 되자, 어릴 적 낭만이 떠올랐다. 헬스장 대신 밖으로 나갔다. 50분가량 떨어진 카페 하나를 골라 길을 걷는다. 위로 솟은 건물만 가득한 도심지라 그런가, 오랜만에 걷는 걸음이 아직 낯설다.
찰나를 즐기는 벚꽃이 나오라고 손짓하니 한번 더 걸어 봐야지. 목적 없이 헤매던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