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거리가 30분이 되는 마법의 시간
올해 봄은 유난히 설레었다. 어떻게 생긴 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옷을 껴입었지만 파고드는 한기를 피할 수 없었다. 12개월을 사계절로 나누면 고작 3개월을 차지하는 겨울이었을 텐데. 몇 년간 계속되는 추위에 지쳐 있다 잊고 있던 따스함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와, 감탄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햇살은 내 몸을 데워주고 간혹 바람이 불어와 땀이 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루들이 떠나는 게 아쉬웠다. 5살 영재에게도.
2022년 10월에 시작했던 상담을 통해 지고있던 짐들을 가지치기했다. 그중 하나가 등원.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을 가는데 오전을 다 썼다. 정해진 등교 시간이 없어 매일이 늦었다. 내일은 일찍 가자 하고는 아침에 잠자는 아이를 깨우지 못한다던가, 겨우 첫 눈을 떠서는 할 일 보다 놀거리를 찾는 영재에게 결국 화내다 현관을 나섰다.
어린이집에서 운영하는 스쿨버스를 알아봤다. 걷는 시간보다 차량을 더 오래 타야 되는 것이 마음에 쓰였지만 겨울이 지나는 동안만 이용해 보자 하던 게 일 년을 훌쩍 넘었다.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버스는 같은 시간에 오는게 좋았다. 기상 시간이 당겨지고, 놀이를 즐길 여유가 사라졌지만 덕분에 나는 오전을 즐겼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배울 수도 있었다. 점심 이후에는 다시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썼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필요한 일들, 청소나 빨래들, 그날이 지나면 사라질 저녁 식사 준비 같은 것들을 하며.
그 사이 영재는 자랐다. 오 센티 커진 키만큼 잘 걷고, 잘 뛰어다닌다. 노는 시간만큼은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 놀아줘야 할 만큼 무한 체력이 되었다.
지난 브런치에 길 헤매는 즐거움에 관해 썼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낭만 가득했던 도보 여행은 정해진 노선을 달리는 차 안에서는 느낄 수 없다. 한 때, 지금도 종종,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을 부러워하고, 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했었다. 반대로 그들은 내가 부러웠겠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특혜를 아이에게도 나누기로 했다.
2주째 어린이집을 향해 같이 걷고 있다.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손깍지를 청했다. 하원할 때는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더니 등원은 사뭇 고요하다. 보도 블럭 틈 사이마다 핀 이름 모를 꽃들이 봉오리가 되었다, 지는 것을 바라본다. 바람이 제법 부는 날에는 매실 열매들이 때 이른 낙과를 했다. 고심해서 생채기 없는 열매 하나를 줍는다. 엄마 주머니에 넣어도 돼? 이따 요리 놀이하자. (집에 와서 다시 찾은 적은 거의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 며칠을 보관한다. 잊고 있다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도로 공사를 알리는 입간판과 정거장에 쓰인 글들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글자들을 놓치면 왔던 길을 돌아간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기껏 파란 우산과 고민하다 집어 든 노란 우산은 몇 걸음 못 가 제쳐두고 비를 맞았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웅덩이를 찾아 첨벙거린다. 제발 사람 지나갈 때랑 엄마한테는 안된다. 뭐가 저렇게 신이 났까 신기하게 쳐다보다 물만 보면 어디든 뛰어들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나를 닮은 거였네.
두 갈림길이 나왔다. 둘 다 비슷한 거리인데도 영재는 고민했다. 이쪽 길이 더 먼 것 같아. 더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은 길로 향했다. 그렇게 멈추고, 흘러가는 계절을 느끼고, 세상을 바라보다 10분 거리가 30분으로 늘어났다. 그래도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사진 찍자고 하면 등만 보이던 영재가 자진해서 포즈를 취한다. 허리를 꺾고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사진 찍어줘. 마지막으로 포옹도 하고, 뽀뽀도 했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 제식 훈련을 받는 군인처럼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눈에 애틋함이 반짝일 때까지 발이 머문다.
“버스 탈 때는 엄마가 안 보고 싶었는데, 걸어가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
전날 저녁 밥상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도 그래.
내가 좋아했던 오전 시간이 다시 사라 졌지만 어른이 된 영재가 꺼내 볼 포근한 추억 주머니가 하나 더 생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