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사람이 되자
“여기 알지?”
“아니?”
“작년 여름휴가 때, 잠깐 들렀잖아”
“진짜? 기억 안 나는데..”
“아니~ 서울 올라오는 길에 커피 마시고 싶다고 하면서 여기 왔잖아. 그때 막 이쁘다고 하고.”
“하하... 그렇구나.”
“또 기억 안 나는구나.. ㅎㅎ 뭐 내가 기억하고 있음 됐지. “
남편과 추억을 소환할 때면 종종 주고받는 대화이다. 남편은 들떠서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데,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이다. 꽤 어렸을 때부터 암기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우는 능력을 체크하는 한자나 국사시험을 치르는데 애를 먹었고, 뒤돌아서면 백지상태가 되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반 친구들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전화번호, 사람 얼굴도 도통 외워지지가 않았다.
대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시험 관련 외국시 번역글을 외우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친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통암기를 한 반면 나는 두세 문장 이후로 단어를 비슷하게 바꾸고 묘하게 새로운 문장으로 바꿨다. 이후로 혼자 곱절의 시간을 투자했지만 결국 완벽하게 외울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건망증을 야기시킨다는 임신 두 번, 첫째 아이가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들을 겪다 보니 나의 과거는 흑백으로 칠해졌다. 약 14,600일의 세월 중 손에 꼽는 몇 가지의 일들만 사진처럼 남았다. “여기 간 적 있어? ” “이 날 뭐 했지? “ 결국 남편을 내 외장 메모리처럼 이용하곤 한다.
전두엽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인데 웬일로 기억하는 일들이 있다. “그건 어떻게 기억해?” “앨범에 그 사진이 있거든!”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름 자세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은 대부분 앨범에 있는 사진들이다. 끊임없이 찍어댄 셔터 속에서 고르고 골라 앨범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장소나 짧은 글을 적으며 일 년에 한두 번씩 과거를 소환했던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도 성공적으로 저장된 것이다. 비록 내 주관적 느낌으로 변형된 사건이더라도 휘발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
앨범에 새겨진 사진만큼 기억에 남았던 행위가 글쓰기이다. 최근에 인상 깊었던 소재들을 쓰며 비슷한 경험들도 들춰본다. 그 당시 주인공의 감정이 어땠는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말이 될 수 있게 적어본다. 나를 모르는 구독자가 그날을 함께 공감할 수 있게 작성한 글을 읽고 고쳐본다. 꼬박 두세 시간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갖다 보니 과거가 문신처럼 새겨진다.
나의 유일무이한 애독자인 남편이 글을 읽고, 그날 저녁 식탁 위의 주제가 된다. 똑같은 하루의 연속인 줄 알았던, 그래서 망각 속에 사라진 수많은 시간들 중에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그 사건은 계속 내 입으로, 글로, 거론되어 나를 이루는 바탕이 될 것이다.
나의 하루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고민과 선택, 노력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 기억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과거들로 모인 나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글의 분량이나 필력에 부담 갖지 말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으로 다시 기록하는 인간이 되어보자. 매일은 힘들더라도 영감이 떠오른다면 가볍게 메모장에라도 끄적여봐여겠다. 곧 글 백 편이 모이고, 천 편이 모인 나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기록을 수집한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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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만에 다시 브런치를 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