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Day 8 마드리드_02
걸어서 프라도 미술관 앞으로 왔다. 멀진 않았지만, 아직 상당히 덥다. 물론, 세비야나 그라나다보다는 좀 낫다. 확실히 마드리드가 윗쪽에 있긴 한 듯.
온라인으로 입장권을 사고, 아내와 둘이 들어갔다. 둘째는 이미 세번이나 방문을 한지라 패스. 우리는 오디오 가이드까지 구매해서, 들으며 관람을 시작했다.
돈이 들어도 문화유산이나 미술관 등을 관람할 땐, 정말 감동이 두배 세배가 된다.
드디어, 드디어..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을 직접 봤다. 스페인 그리고 프라도미술관에 온 가장 큰 목적 중 하나 달성!
생각보다 엄청 큰 그림이었다. 그림에 담긴 여러 이야기, 벨라스케스의 신분상승욕구까지 지금까지 듣고, 읽었던 이야기가 스쳐갔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실은, 이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 건 대학시절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이란 책에서였다. 푸코는 이 책 1장을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 대한 분석으로 채우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뭔 소리인지 진짜 하나도 이해가 안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책 자체가 어렵기도 했거니와, 그 당시 이 그림을 본 적도 없던 나로선 그림의 각 부분을 이용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이해가 될 리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의 영어본을 발견했다. ‘The order of things: An archaeology of the human sciences’란 제목이었는데, 그 제목 아래 표지가 바로 이 그림이었다.
앗! 그 공주가 얘구나. 그 화가! 시녀들, 개,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 저 멀리 계단을 올라가다 방안을 바라보는 사람까지. 1장의 설명이 바로 이 그림을 찬찬히 따라가며 이뤄진 것이었다. 당장 샀다. 그리고, 그림을 따라가며 다시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이해되었냐고? 천만에~ 푸코는 너무 어려웠다. 해석을 해 놓은 글들도 찾아봤지만, 이 또한 무슨 말인지.. ‘…푸코의 분석에 의하면,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고전적 재현의 재현이고, 재현을 낳는 것은 화가의 시선이 된다. 재현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 시선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뭐 이런 글들이었다. 지금 봐도 이해가 안된다.
대신,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나니까, 이 그림 이야기가 가끔 눈에 띄었다. 푸코만 관심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런 저런 해석과 함께 최애하는 미술사에 손꼽히는 명작이었다. 심지어 피카소는 자신의 ‘라스 메니나스’를 여러 편 그리기까지 했다.
여러 해가 지나 실제로 이 그림을 마주하고 있다. 그림 속의 그려지는 대상이면서 저 멀리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왕과 왕비, 엄마와 아빠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공주, 그 옆의 시녀들과 개,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벨라스케스까지 커다란 원샷으로 펼쳐진다. 캔버스 옆으로 고개를 내민 벨라스케스가 왕과 왕비가 아닌 이 장면(라스 메니나스라는 그림)을 관람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한참을 바라봤다
그런데, ‘라스 메니나스’ 만큼이나 내 눈길 아니 마음을 끈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이 있었다. 궁정의 난쟁이와 광대를 모델로 한 초상화였다. ‘앉아있는 궁정광대의 초상’, ‘후안 데 파레야의 초상’ 등 딱 봐도 천한 신분의 사람들인데, 이상하게 진지하다. 궁정에서 왕족들을 위한 놀이개처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인데, 전혀 우스꽝스럽거나 천박하지 않다. 이들을 그저 주변인이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벨라스케스의 시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건 그냥 내 느낌이다. 벨라스케스는 젊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출세 내지 신분상승에 집착을 했다고 전해진다. ‘라스 메니나스’속 화가의 가슴에 그려진 십자가 문양도 처음엔 없었는데, 기사작위를 받고나서 추가해서 그려넣었다고 하니, 얼마나 신분상승의 욕구가 강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벨라스케스의 이미지와는 약간 삔뜨가 맞지 않거든.
많은 작품들을 봤는 데, 기억에 남는 다른 작가는 고야다.
고야가 출연(?)하고 있는 '카를로스 4세 가족', 프랑스군이 스페인 민중을 처형하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그리고 유명한 누드화 '마야' (옷 입은 그림과 옷 벗은 그림 두 편), 무서운 그림인 ‘사투르누스’까지. 프라도 곳곳에 고야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이 사랑할 만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 말고 사랑.
두시간도 넘게 프라도에 머물렀지만, 몇 작품 보지도 못했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주일 정도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미술관 투어를 해야만 그나마 좀 봤다 싶을 것 같다. 어쨌거나, 감동. 여기에 라스 메니나스를 만난 일은 오랜 숙제를 마무리한 것 같은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호텔에 돌아와 씻고, 조금 쉬다가 다시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을 거하게 그리고 맛나게 먹었지만, 움직임도 많았고, 또 마드리드의 저녁거리도 보고 싶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저녁도 맛있는 곳을 찾아보자.
솔광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밤거리가 운치있다. 마드리드도 역시 6시 이후에야 활발해진다. 꽤 걸어서 도착을 했는데, 사람들이 많다. 예약이 다 찼단다. 아참, 오늘이 토요일이다. 1시간을 기다리란다. 오 노~ No gracias!
다른 곳을 찾아갔는데, 거기도 만석. 주말인데다 시간대도 안좋다. 한창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다. 이런.. 그래서, 어쩌지 하며, 슬슬 걷고 있는 데, 또하나의 구글맵에서 검색한 후보식당이 보였다. 밑져야 본전. 예약은 안했는데, 좌석이 있냐고 묻자, 식사 테이블은 아니지만, 바 쪽에 있는 테이블 자리가 있단다. 세사람이니 앉겠다면 스툴을 준비해 주겠단다. Gracias!
맥주와 클라라 2잔. 그리고 먹물 빠에야.
사실 점심이 매우 거했고, 배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느데, 이건 너무 맛있었다. 먹물 빠에야. 스페인에 와서 먹어본 빠에야 중엔 가장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밤거리가 차분하고 예뻤다.
그렇게 마드리드의 첫날밤이 마무리되었다. 행복하게.
Muchas grac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