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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Jun 10. 2019

11. 당신은 아직 동심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one-way ticket project #11 스톡홀름


01. 잊고 있던 한 소녀


우리가 흔히 북유럽이라 부르는 세 나라.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 물론 덴마크도 들어가겠지만. 여행을 준비하며 내 관심에서 제일 멀리 있었던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핀란드는 예전의 좋은 기억을 간직한 채 나를 부르고 있었고 (물론 지금에 와선 그 좋은 기억이 다 깨져버렸지만), 노르웨이는 피오르(Fjord)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그간의 내 삶에서 딱히 이렇다 할 인상적인 매력을 남겨둔 게 없었다. 어찌 보면 핀란드와 노르웨이 사이에 있으니 한번 가주지... 정도랄까. 그렇게 별다른 기대도 없이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난 스톡홀름에 첫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새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알맞게 박혀있는 푸른 하늘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달래줄 시원한 바람이 이 도시의 첫 산책을 들뜨게 해 준다. 상당히 기분 좋은 더움이다. 하천 옆 산책로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 위 가로등에 걸려있는 낯익은 소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 어... 저거 누구 더...'

' 앗!! 삐삐다!! 말괄량이 삐삐다!!'


분명 삐삐였다!

얼굴에 주근깨 가득한 사고뭉치 소녀장사 삐삐.

어린 시절 TV에서 재밌게 봤던 바로 그 말괄량이 삐삐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가 불현듯 떠오르고 자연스레 입가에 맴돈다.


삐삐를 부르는 환한 목소리~

삐삐를 부르는 상냥한 소리~

.

.

들쑥날쑥 오르락내리락 요리조리 팔딱팔딱

.

귀여운 말괄량이 삐이~삐!!


맞다. 그랬다. 스웨덴은 삐삐의 나라였다. 나이가 좀 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삐삐는 스웨덴의 TV 드라마였다.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오는 아련한 추억에 길 위에 선채로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본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되살아나 연신 미소도 머금어진다. 여기서 삐삐를 마주치게 될 줄이야.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다시 그녀와 마주쳤을 때 나는 이미 하루 종일 삐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 터였다.


이제 스웨덴이란 나라도 내 기억 속에 남을 한 가지가 생겼다.

이 곳은 바로 말괄량이 삐삐의 나라이니까.




02.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간 보았던 많은 블로그에서도, 그리고 여행책자에서도 『스칸센(Skansen)』 은 스웨덴의 민속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가(오늘은 동행이 있다)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어느새 주변은 오래된 건물들보다 하나둘씩 보이는 동물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공작새 두어 마리가 휴식 중인 사람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 꽁지의 깃털이 손에 닿을 듯 스쳐가자 급기야 아저씨 둘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와~ 여기 뭐지!! 대박인데!!


여기도 저기도 동물 친구들 천지다. 대체 얼마 만에 동물원이란 곳에 와본 거지. 정신줄을 놓은 채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동물 구경에 빠지다 보니 나이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나도 눈 앞의 쟤네들이 신기하고, 오랜만에 동물친구들과 함께하니 신나는 게 사실인 것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지니 이렇게 작은 일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큰 기쁨을 발견한다.



잠시나마 돌아간 동심에서 빠져나와 다시 스칸센을 걷는다. 꽤 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스칸센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니는 일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따가운 햇살도 만만치 않고,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목재 건물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얼마간을 돌아다녔을까, 아담하게 꾸며진 이쁜 정원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데...


응?!

오잉??

어라???!!!

저 멀리 눈앞에 그 옛날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렴풋이 누군가 서있는 것 같아 시선이 향한 그곳에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두 여성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만큼이나 햇살이 겨우 들어오는 나무 그늘 사이로 아스라이 보이는 분위기도 신비롭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 가슴은 또다시 흥분상태가 되기 시작. 놀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그쪽으로 다가가려는데


우왓!!!!!!!!!!!!!!

이번엔 더 진짜 옛날 같은 모습의 사진사 아저씨가 나타났다!!


잔뜩 흥분한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그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런 우리를 부른 아저씨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사진기의 뷰 파인더를 넌지시 보여주었다. 1~2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진기, 그 속으로 보이는 흑백의 희미한 피사체는 바로 과거 그 자체였다.



이후에도 스칸센을 걷는 내내 옛모습 그대로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분명 아니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며 몇백 년 전의 그때로 순간이동을 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 또 우리는 한참을 흥분했더랬다.


그들이 그토록 신비로워 보였던 이유는 아마도 단순히 오래된 건물 사이로 옛스런 복장을 한 채 지나다녔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그런 건 우리나라 민속촌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이 옛날 스웨덴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몰입했고, 우리와 같은 관광객은 자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몸짓하나 대화하나 당시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배역을 허투루 연기하지 않고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과 인위적이지 않고 상업적인 모습은 최소화시킨 주변 환경,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로 만들어버리는 스톡홀름 스칸센의 진짜 매력이었다.





[D+32] 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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