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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May 11. 2024

이기적 유전자와 자연선택에 반항하는 인간

왼쪽은 마우스의 뇌신경 네트워크    오른쪽은 20억 광년 크기의 우주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칼 세이건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과학이 발견한 진실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일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과학이 세상과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도 깊게 공감한다. 그는 과학이 가진 가치와 영혼의 의미를 진화론의 입장에서 설명하기 위해 종교와 철학, 생물학자들과 많은 논쟁을 벌인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도킨스의 글에 의하면 그의 <이기적 유전자>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에 반기를 들고 자연선택과 이기적 유전자의 통제를 벗어난 인간의 두뇌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가 명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생활을 하는 생물들의 이타적 행위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생겼다. 이런 논쟁과 연구의 진전에 의해 자연선택과 이기적 유전자론은 인간의 우월성,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깨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고 생명세계의 현상, 동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론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논쟁적 글들을 집필하고 발표했다. 가장 기본적인 오해는 이기적 유전자는  종의 DNA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지 하나하나의 개체가 이기적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연구도 이기적 유전자와 반대되는 듯 보이는 행동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집단의 유전자를 보호하고 후손을 번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기능은 유전자와 상관없는 자유의지의 발현일까?

도킨스에 의하면 자연선택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DNA는 그저 분자에 불과하고 분자는 생각할 수 없다. 다른 동물들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은 장기적 관점을 가진 관리자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기적 이득을 선호한다. 현재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소모하는 벌목이나 포경, 기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는 단지 야생의 생물들이 30억 년 동안 해 온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다른 문제이다. 두뇌는 용량만 충분하게 크면 모든 종류의 가상의 시나리오를 예상해서 대안적 행동의 결과들을 상상하고 계산할 수 있다. 두뇌는 목표와 목적을 설정하고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이런 행위를 하면 단기적으로 이런 이익이 있고 저런 결정을 하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선택에 따른 원래의 진화는 기술적 향상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되었지만 앞날을 이런 방식으로 내다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기능은 오로지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서만 작동했다. 즉 유전자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한 목표를 가능한 한 융통성 있게 설정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었다. 그래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새로운 두뇌 기계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목표 내에서 하위 목표를 재설정하는, 목표의 위계질서를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 것이다.


상상력에 기초한 예측은 원래는 유전자의 단기적 이익에 유익했지만 이제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손아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두뇌는 유전자의 자연선택의 법칙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정치적 제도, 법과 사법 체계, 세금, 정책, 공공복지, 자선, 약자들을 위한 돌봄의 장치를 도모할 수 있다. 자연선택의 법칙을 거스르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인간은 자연선택과 유전자의 이기적 법칙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자연선택은 인간의 두뇌가 커지도록 허용함으로써 이 기능이 더 발전하도록 했다.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두뇌는 이 변이적 기능으로 인해 자연선택의 법칙에서 멀리 도망친 것이다.


이러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두뇌의 반란’이라는 개념에 대해 도킨스가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새로 받아들여 진화론의 결정론을 훼손시켰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킨스는 이러한 비판이 진화론과 자연선택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탓이라고 비판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논쟁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인간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조건이 될 때까지 피임을 한다. 우리가 자손을 통해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전념하지 않고 강의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소나타를 작곡하는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반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복잡한 철학적 논쟁이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문제이다.

전자 컴퓨터가 애초에 계산기로 시작해서 워드 프로세서가 되고 체스 플레이어가 되고 백과사전이나 전화 교환기가 되고 전자 현미경이 된 것처럼, 우리가 섹스의 즐거움을 성의 다윈적 기능과 분리시킬 때 이기적 유전자를 속인 것처럼, 우리가 언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함께 앉아 그 자체로 매우 반 다윈주의적 추동력을 가진 정치적, 윤리적 가치에 대해 논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다.


우리의 두뇌가 미래를 예측한다면 그건 우리의 과거 (DNA)에 그 기능이 유효했고 그것이 살아남는데 유효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전자에게는 사실은 미래에 대한 설계기능이 없다. 유전자는 오직 과거의 기록일 뿐이다. 만약 어떤 동물이 발견한 음식을 당장 다 먹어 치우지 않고 어느 정도 안전한 곳에 보관해서 훗날을 도모했다면, 그 덕분에 그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그의 유전자가 후대에 더 많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좋은가 생각을 하는 중개자가 아니다. 살아남은 유전자는 결과적으로 조상들이 살던 환경에서 생존과 재생산을 도와준 적절한 경험칙과 행동으로 무장한 두뇌이다. 유전자가 미래에 대한 예측 기능을 가졌다면 결국 그 유전자의 과거에 일어난 변이가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타적 인간/윤리적 인간은 자연선택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일까?

다윈은 자연선택에 반하여 자기희생적이거나 약한 종을 돕고 보호하는 인간집단의 노력을 이렇게 설명한다.즉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 보다 구성원의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높여 결국 그 집단의 생존력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집단선택론이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도덕성과 이타주의를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발달시킨 고유한 가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어떤 도덕이나 가치가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윤리나 가치는 DNA라는 경전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절대적 가치나 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왜냐하면 윤리나 가치는 '시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인간의 윤리, 가치가 이 시대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두뇌가 창출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유전자 밖의 진화 즉 교육과 문화를 통한 인간의 지식과 가치, 윤리의 진화는 두뇌의 진화과정에서 일어난 변이의 결과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변이가 가져온 결과가 그 집단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보존되어 온 것이다.


흔히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표현하는 기능 역시 어느 순간엔가 진화의 역사 속에서 출현된 것이며 인간은 두뇌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여 그 기능을 크게 확장시키는 전술을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제 인간이 자연선택의 오래된 법칙에 반기를 들만큼 힘을 가지게 되었다.


도킨스는 인간만이 이기적 유전자를 복제하는 DNA분자의 독재를 이겨내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미래를 잉태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기적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첫 종이다. 우리 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그것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며 장기간에 걸친 결과들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큰 두뇌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두뇌는 애초에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자연선택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자연선택은 단지 산을 오르기만 하는 로봇과 같다. 산을 내려가기 위한 기능이 없다. 유전자에는 본래적 예측기능도 없고 현재의 이기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종의 멸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는 기재도 없다. 실제로 여태까지 존재해 온 생물종의 99%가 멸종되었다. 인간만이 멸종으로 이르는 내리막 길 앞에서 계곡 너머를 보고 멸종으로 이르는 길을 피해 멀리 보이는 새로운 등성이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모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미래에도 지구가 살아남길 바란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 째 일은 자연으로부터의 충고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연은 다윈주의적 단기적 이익 취득자이다. 어떤 종이 장기적 계획에 따라서 관리인이 될 가능성 자체는 지구에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매우 낯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미래라는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새로운 발명품이다. 소중하고 연약한 것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과학적 책략을 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올바르게 예측하고 생존을 위해 바람직한 선택을 한다면 변화하는 환경에 맞춘 더딘 신체적 진화 대신 두뇌에 대한 투자를 선택한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그 유전자가 오랫동안 계속 복제되고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예측과 선택에 실패한다면 99%의 멸종된 다른 생물들의 길을 가게 될 것이며 두뇌의 반란은 성공한 혁명이 아니라 실패한 쿠데타가 될 것이다.


우주를 닮았다는 우리의 뇌는 우주의 시간을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앤 드루얀이 기대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가 초래한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의 태양이 적색 거성이 되면 삶의 보금자리를 먼 토성의 행성으로 옮기고, 태양이 완전히 불타고 먼지로 분해되기 전 다른 태양계의 새로운 생명계를 찾아 이주할 만큼 현명하고 성공적인 유전자를 가진 종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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