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아래로 요세미티 계곡이 보인다
아침 7시 동생과 나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하루 만에 다녀올 예정이라 그야말로 거창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에서 한 두 가지 음식 맛만 보고 오는 여행이 될 것이다. 1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공원 안에 있는 호텔에서는 최소 2박은 되어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고 우리는 다음 일정 때문에 2박은 어려웠다. 새크라멘토 동생 집에서 요세미티까지 왕복 7시간을 빼면 실제 공원을 구경하는 시간은 5-6시간. 하지만 말로만 듣던 요세미티를 슬쩍 맛만 본다 해도 그래도 그게 어디냐 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서자 눈앞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답게 커다란 화강암 절벽과 계곡, 강물들이 어우러진 풍경들이 창밖으로 지나간다. 산불로 인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면적의 숲이 하얗게 빛나는 풍경조차 내 눈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 없이 달리는 듯하다가 드디어 요세미티 밸리 마을에 도착했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도 아니고 국립공원의 주요 드라이빙 코스나 하이킹 코스가 눈이 다 녹지 않아 통제되고 있는데도 밸리의 주요 주차장 입구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동생 말에 의하면 여름에는 공원에 입장하는 데에만 한 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요즘도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닌데도 주말 방문자들은 최소 일주일 전에 입장권을 예약해야 한다. 우리는 주말을 피해 월요일에 갔기 때문에 그래도 입장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중요한 코스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요세미티의 상징과 같은 거대한 몸통의(성인 열명 이상이 팔을 벌려 안아야 한다는)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들을 볼 수 있는 마리포자 그로브Mariposa Grove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차들이 그곳으로 갈라지는 길 입구에서부터 밀려서 움직이질 않는다. 요세미티 폭포와 하프 돔, 밸리의 전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글래셔 포인트는 아직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6월이나 되어야 눈이 녹고 길이 열리는 모양이다.
대신 우리는 폭포와 계곡과 냇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음껏 즐겼다.
가지 못하는 곳 대신에 우리는 여름에는 사라지고 없는 폭포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지금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중에는 여름에는 사라지고 없는 폭포들이 여러 개 있다. 눈이 녹아내리는 봄에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인 셈이다. 요세미티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에 흠뻑 젖은 나를 보고 동생이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폭포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가는 순간 순식간에 불어닥친 바람에 날아온 물보라를 잔뜩 뒤집어쓰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 그 자체가 되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투명하게 맑고 차가운 계곡 위 다리를 건너 하늘 높이 솟은 세쿼이아 나무와 붉은 향나무red cedar 숲으로 들어섰다. 숲이 주는 특별한 향기와 하나 하나 서로 다른 생명들의 향연에 취한 채 가벼운 트레일을 한 바퀴 돌았다. 계곡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들이 모여 제법 너른 내를 이루고 있는 강가에 이르자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기도 하다. 물가에 자란 연록색 활엽수들이 내를 더 푸르고 투명하게 비춘다. 반대편으로는 멀리 기암괴석과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보인다. 선경이 이런 것일까...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류시화 작가가 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산문집에 이런 글이 있다. 인도 여행을 거듭하며 작가는 갈 때마다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만난다고 했다. 영적 스승을 만나 삶의 해답을 얻고자 갈망하며 떠난 인도 여행길에서 작가는 그 해답을 찾았을까?
모든 면에서 내가 상상한 인도가 아니었다. 영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는가? 아니다. 걸인과 가짜 수행승이 더 많았다. 갠지스강은 순결하고 성스러웠는가? 아니다. 시체가 종종 떠다녔다. 거리에는 꽃들이 향기를 퍼뜨렸는가? 아니다. 각종 똥이 더 많았다. 조화롭고 지혜로운 이상세계였는가? 아니다. 인간존재의 부조리함과 혼돈에 머리가 어지러운 세계였다. 눈이 커질 만큼 매혹적인 인도 여성들이 많았는가? 아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깊은 만남을 갈구하고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단단한 에고의 층이 생생한 경험들로 인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기대한 인도가 전혀 아니었다. 나보다 열 배는 긴 머리를 한 탁발승도. 기차 안에 난데없이 나타나 낡은 북을 두드리며 "너는 여인숙에 묵은 손님이라네. 네가 묵고 있는 방은 다른 손님이 묵고 있었다네. 그 사람이 떠나고 이제 네가 도착했네. 너도 머지않아 떠날 것이라네."하고 노래하는 노인도 내 상상 밖이었다. 그래서 그 낯설고 특별한 세계에 정신이 압도당하고... 예상하지 못한 숱한 사건들로 나의 여정을 다채롭게 색칠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관념으로 그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자아를 부수기 위해 간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내 생각과 선입견을 비우고, 안으로 깊어지고 밖으로 더 넓어지기 위해.
우리는 요세미티에서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뜻밖의 풍경들을 볼 수 있었음에 감격했다. 뭔가를 기대하고 떠나는 길이지만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이 우리를 맞이해 줄지는 미지수이다. 여행길이 항상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것 또한 재미없는 일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며 설레는 것은 그 여정에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건과 풍경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류시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생도 그런 것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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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요세미티에 다녀온 다음날 더위를 식히기 위해 팥빙수를 먹으러 나갔다.
미국식 과일 빙수와 한국 전통식 팥빙수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말에 주저 없이 한국식 팥빙수를 선택하였다. 20분이나 자동차를 달려 찾아 간 팥빙수 가게. 눈같이 부드러운 촉감의 살살 녹는 빙수 위에 넉넉히 얹힌 팥과 미숫가루, 떡 조각. 바삭하게 구워진 붕어빵도 한 마리씩 곁들였더니 배가 가득 찼다.
맛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젊었던 시절,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인생이 이렇게 상쾌하고 달콤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나의 삶은 그 때와 얼마나 다른 길로 달려왔던가. 쓰고 아프고 괴로운 시간이 점철되었고 마지막에는 그래도 그 삶을 언제든 함께 해줄거라 믿었던 사람도 잃었다. 대신에 나는 다른 달콤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픔과 슬픔을 잊게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덧붙여진 새로운 인생의 콘텐츠들이라고나 할까. 류작가의 말대로 인생은 그렇게 '다른 것'을 발견하는 모양이다.
하루동안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그 다음날(5월 15일) 7박 8일의 자동차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새크라멘토에서 솔트레이크 시티(9시간 운전, 2박)-옐로 스톤 국립공원(6시간 운전, 2박)-글래셔 국립공원(7시간 운전, 2박)-노스 캐스캐이드 국립공원(7시간 운전) 근처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노스 캐스캐이드 국립공원을 관통하며 구경하고 캐나다 버나비(8시간 운전)로 돌아오는 여행이다. 은퇴 후 각종 연금과 의료보험 등 더디고 비효율적이고 불친절한 미국의 공공 시스템과 씨름하며 골치 아픈 일들을 마무리한 동생은 드디어 마음속에 그리던 여행을 곧장 떠나고 싶어 들썩거렸다. 마침 버나비 딸네 집에 와있던 나를 여행길에 동반자로 삼고 싶어 새크라멘토로 불렀다. 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22일까지 반드시 캐나다로 돌아와야 한 탓에 여행일정이 빠듯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원래 "깊게 보는 것보다 넓게 보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이니까.." 깔깔거리며 여행일정을 잡았다.
류작가와 다르게 특별한 무엇을 기대하지 않고 백지상태로 떠나는 나의 여행은 미리 그려놓은 밑그림이 없기에 정말 보이는 그대로 마음 가는 그대로를 담는 그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