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순환은 어렵지 않다
한창 새내기 시절 늦게까지 술자리에서 놀다가 새벽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나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적이 손에 꼽는다. 애초에 술을 안 받는 몸인지라 즐겁게 취하지도 못할뿐더러 딱히 음주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저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이 좋아 못 이기는 척 자리에 갔을 뿐.
길거리에는 취객이 가득하다. 개중에는 스스로 감당 못 할 정도로 술을 들이부어 누가 봐도 주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놀랍게도, 아무도 그들에게 괜찮냐고 묻거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조금 삭막하다. 정이 가득한 나라라고 하던 한국의 길거리가 언제 이렇게 냉정해졌을까. 조심스레 다가가 괜찮으신지를 묻고 택시나 경찰을 불러드리고 자리를 뜨곤 했다.
남에게 잘해줘서 좋을 것 없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글쎄, 마냥 그렇지만은 않을 텐데. 혹시 몰라 말해두자면 나는 절대 정이 많거나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내 영역의 구분이 누구보다 민감한 개인주의자에 가깝지. 나는 각자를 존중하고 갸인 간의 선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냉정하다는 이야기도 꽤 많이 듣는 편인걸. 가끔은 그런 모습이 관계에서 방어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기에, 자주 반성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선의와 호의의 힘을 믿는다. 투자의 법칙은 돈벌이가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적용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어야 한다는 간단하고도 따뜻한 원칙을 세상은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주고받는 과정은 점점 커져, 결국 행복의 총량을 늘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창조 경제가 아닐까. 혐오의 시대. 각박해지는 미소와 안부인사. 다들 삶에 치이고 마음이 상처 입은 탓임을 알고 있기에 가끔은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도 욕심을 부려보자면 나는 세상이 그렇게 차갑지 않았으면 좋겠다. 술 취한 놈 택시 안 잡아줬다고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지나가던 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벼운 웃음을 건네고, 무거운 것을 들고 가는 이를 거들어주며, 곤란한 누군가를 구하려는 손길이 하나라도 늘기를 소망해 본다. 아, 나 너무 이상주의자인가.